2019.11.05(화) 룻 1:19-22
룻 1:19-22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오미의 귀향 소식에. 마을은 떠들썩했고.
하나 둘 나오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나오미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묻고 싶은 얘기도 많은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들은 어디갔는지.
여기. 이름 모를 젊은 여자는 누구인지."
그저. 속으로 되내일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 나오미 맞어?"
사람들의 질문에.
나오미가 찬물을 끼얹듯이 대답한다.
"나를 나오미(기쁨)이라 부르지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이 나를 괴롭게 하였으니.
이제 나를 마라(괴로움)이라 부르십시오."
남편을 잃고.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가.
지나온 삶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 것이다.
"주님께서 손으로 나를 치셨으니(13절)"
"전능하신 분이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20절)"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이 나를 불행하게 하셨으니(21절)"
나오미의 탄식과 절규 앞에.
무어라. 답할 수 있을까?
신학적인 답변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함께 애통하며. 울 뿐이다.
얼마나 속이 상하고. 힘들었으면. 이렇게 말할까.
나오미의 말 이면에 담겨있는.
그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다.
오늘 내 곁에도. 이런 친구들이 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를 괴롭게 하셨으니.
나를 나오미라 부를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의 얘기를 들으며. 나 또한 마음이 무너진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되물어보기도 하고.
그동안 나는 무얼했을까. 자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마음을 담아 그들과 연대한다.
"큐리에 엘레이손. 주님.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기도조차 할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우리가 대신 기도하며.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터전을 마련한다.
실제적인. 사랑의 나눔과.
안전한 울타리(공간)을 만듦으로써.
지친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한웅재 목사님이.
자기 딸에게 불러주었던. 노래말처럼.
"외로운 사람들 품에 안아줄수 있도록.
삶에 지친 사람들 찾아와 쉬어 가도록.
우리 맘속에 소중한 것을 나누며.
누군가의 자리를 남겨두고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하나님 나라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