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5(수) 행 4:13-22
행 4:13-22
산헤드린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은 얕잡아 보았다.
갈릴리 시골 출신에. 배운 것도 없고.
출신도 별 볼 일 없는. '듣보잡'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제자들의 강단있는 태도와. 논리 정연한 말.
특별히 구약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가르침에는.
그들이 도무지 헤아릴 수 있는 힘과 지혜가 있었다.
현장의 분위기 또한 제자들 편이었다.
눈 앞에는. 병고침을 받은 사람이 분명히 서 있었고.
이 일을 목격한 많은 증인 또한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이번 한 번은 봐 준다. 앞으론 조심해"
마치 넓은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허세를 부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그들의 존심. 그들의 고집이. 구원의 걸림돌이 되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산헤드린 공회는.
"제자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고. 우리도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였다.
눈으로 보고. 머리로 깨달았지만.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가슴 아픈 것은. 자기만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도록.
제자들의 복음 전도를 위협하고. 그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절대로"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 말아라.
"절대로" 예수의 이름을 가르치지 말아라.
마치. 예수님이 계실 적에. 바리새인들의 모습처럼.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마 23:13)" 것과.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베드로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절대로"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절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쩜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한쪽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믿지 않는다.
또 다른 한쪽은. 보고 믿으며 이를 증거한다.
한쪽은. "절대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며.
한쪽은. "절대로"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이다.
"구원의 진리에 이르게 하는 것은.
인간의 탁월한 언변도 아니며, 기적에 달린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그제서야 구원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실로 그러하다.
사역을 하며. 수련회를 준비하며. 학생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 성령의 감동/기름부으심이 필요하다.
주님의 은혜 아니고서는. 우리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주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증언할 따름이다.
그렇게 우직하게 주님의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이것을 노래하며. 또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구하는 것은.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이다.
"주님. 우리 학생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눈으로 보고. 말로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주님 그들을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주님. 우리 간사/리더/선생님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시오.
눈 앞에서. 우리를 낙심케 하며.
우리를 위협하는 파도에 움츠려 들지 않게 하시며.
오직. 믿음의 주요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주님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복음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으로 오늘을 살게 하여 주십시오."
한 구절 한 구절이 기도가 되며.
이것이 우리의 바람/소망이 된다.
오늘 한 날. 이 말씀을 기억하며.
오늘 우리 삶을 주님께 드린다.
주님 도우시며. 주님 일하시기를. 간구하며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