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07(금) 행 9:1-9
행 9:1-9
사울은. 누구보다. 유대교 신앙에 열심이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빌 3:5-6).
한 마디로 족보있는 집안에. 엘리트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의 스승 또한 대단한 사람이었다.
당시. 유대에서.
가장 존경받는 랍비 가운데. "가말리엘"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바울의 멘토/스승이었다.
그러니. 유대교를 향한.
또 하나님을 향한 그의 충성심은. 얼마나 컸겠는가.
그랬던 그에게.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스승 가말리엘의 권고였다(행 5:34-39).
가말리엘이 말하기를.
"이들의 계획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망할 것이요.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면.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 없으니.
도리어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두렵다" 하였는데.
사울의 입장에선. 이것이.
옳지 않은 결정, 비겁한 타협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독자적인 행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사울은. 스데반이 죽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으며.
교회를 없애기 위해 날뛰며.
예수의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감옥에 넘겼다(행 8:1-3).
오늘 본문에서는. 그 활동 반경이.
예루살렘을 넘어. 다메섹(다마스쿠스)까지 확장된다.
사울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다메섹을 향했으며.
대제사장에게 받은 편지(범인 송환장)를. 손에 쥐고.
닥치는 대로. 그리스도인을 잡아오려 하였다.
그는 이 일이 옳다고 여겼으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러한 사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의 눈을 멀게 하며. 그의 분을 가라 앉히고.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며 침묵하도록 하신다.
성난 황소처럼. 또 미친 개처럼. 날뛰던 사울이.
온순한 양이 되어. 주님 앞에 길들여져 가는 시간이 된 것이다.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되돌아본다.
"그릇된 확신/신념"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내가 하는 일이 옳고, 내 판단이 맞다"고 자만할 때.
우리는. 사람을 등지고. 하나님을 등지게 된다.
인애와 자비가 아닌. 살기 어린 눈빛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며.
내 편이 아니면. 모두를 적으로 돌려 세운다.
항간에. 보수 기독교에서 벌이는. 정치 형태 또한 그러하다.
이것이 무섭다.
다른 사람의 얘기가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 조차 외면하고.
자기 확신이라는. 패러다임/신념 속에 갖혀서.
십자군 원정과 같은 짓을 벌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내 안에 사울은 없을까 돌아본다.
나는. 그릇된 확신/신념에 빠져서. 주님 음성 듣기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을까.
바라기는.
"나의 계획이 실패하고. 나의 소망이 끊어질 때.
삶의 주관자 되신 그분 앞에. 나의 무릎을 꿇는다"는
찬양의 고백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유순한 마음 주시길 기도한다.
나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열심을 의뢰하며.
나의 의가 아닌.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며.
주님 앞에 "들을 귀" 있는 자로 살아가기를.
간구하며. 또 엎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