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0(월) 시 134편
시 134편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의 표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성전에 올라가며 드리는 노래"
그렇기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집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마다. 혹은 밤마다. 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그 노래의 마지막이다.
다시 말해서. 순례자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다음.
주님의 전을 바라보며 드리는 노래.
바로 그 노래가. 오늘 시편 말씀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시편 기자의 마음은.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웠을까.
실로 그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다.
그리고 그는. 성전 문 앞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밤에 주님을 송축하여라.
성소를 바라보면서 주님을 송축하여라"
짧은 구절이지만. 시편 기자의 고백이.
나에게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특별히. "밤에" 주님을 송축하여라는 것이 인상적이다.
기독교 영성가들은. 흔히.
"밤"을 인생의 고난. 하나님의 침묵/부재의 순간이라 말하곤 한다.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할 지,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고.
야생에선. 들짐승의 울음 소리만 가득하다.
그렇기에. 한 밤중에 우리는. 위축들고. 두려워하기 십상이다.
또 인생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삶의 모든 여정을 마치는 순간이 아닐까 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 태어나서.
잠자리에 들기까지 -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루라는 짧은 시간 속에. 인생의 여정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편 기자가 하는 말이.
"밤에" 주님을 송축하라고 한다.
"성소를 바라보며" 주님을 송축하라고 한다.
때때로. 우리 인생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오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을 송축하라고 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삶의 모든 여정을 마치는 순간에도.
주님을 바라보며. 그 주님을 송축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 고백이 허투로 들리지 않는 것은.
시편 기자의 삶이. 진정 그러했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 나와 우리의 고백도 그러하길 소망한다.
"힘겨울 때 다시 봄" 이 고백이 오늘 나의 고백이다.
그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기를.
그 주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간구하며. 내 삶을 주께 드린다.
(feat. 해가 뜨는 아침에 주를 찬양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