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9(수) 행 11:1-18
행 11:1-18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세례를 주었다.
이 소식은. 곧 널리 전파되었다.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신도들 또한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반응이. 뜨악하다.
기뻐하기는 커녕. 베드로를 책망하고. 나무라고 있다.
"어떻게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식탁 교제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물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쏘아붙인다.
살벌하게. 그것도 아주 살벌하게 말이다.
그런데. 이들의 모습을 어디서 많이 보았다.
바로.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다.
예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그러지 않았던가.
"너희 선생은. 어찌.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냐(마 9:11)"
제자들이 그토록 싫어하고 외면했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오늘.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제자들은. 그 울타리/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똑같은 문제 앞에. 똑같이 넘어지고 있을까?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묵상했던 것은 이거다.
"유대에 있는"
이미 하나님의 복음은. 사마리아를 거쳐서 온 세상 가운데. 전파되고 있는데 (행 8-10장).
그들은. 여전히 "유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그들의 관념/패러다임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서. "탁상공론".
"책상머리에서만 말씀을 읽고. 예배를 드리니".
복음의 적실성. context와 contents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말씀을 보면서. 나도 이렇게 될까 두렵다.
그렇기에. 바라고 기도한다.
1) "유대 안에서 / 교회 안에서만" 복음을 말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을 전파하며.
2) "책상머리 앞에서. 말씀 안에서만" 하나님을 배워가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실제로"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길 말이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넓어지고 깊어지길 소망한다.
성숙은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 앞에서. 또 지체들 앞에서. 끊임없이 나를 돌아보고 성찰함으로.
진짜 어른. 진짜 주님의 백성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또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