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3(수) 히 11:8-22
히 11:8-22
주님은 우리에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자.
여기 나오는 '불빛'은 어느 정도의 밝기/빛을 자랑할까?
'등대'처럼. 어두움 밤바다를 환히 비추는. 그런 불빛일까?
물론 우리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당신에겐. 충분히 그럴만한 능력이 있으시다.
하지만.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할 때.
이것은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초롱불' 정도를 뜻하는 것이다.
멀리까지 빛을 비추지는 못 한다.
그저 우리가 안전하게 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한치 앞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의 원리이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왜 안전에 대한 욕구가 없겠는가.
우리도. '모든 것'을 알고. '안전하게' 발을 내딛고 싶은 욕심이 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제한된 인생의 길을 보이신다.
도리어.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하루하루 주님의 뜻과 인도를 따라 살아가길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인생이 그러하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인생을 가리켜.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길을 떠났다."고 말한다.
사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처음 나서는 길이라면.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믿음으로 길을 떠났다. 뭐 이런 엉터리가 있을까.
사라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자녀를 주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렇게 몇십년을 기다리기만 하였다."
대충이라도 때를 알면 기다리기라도 할 텐데.
하염없이/속절없이. 기다리고만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이다.
결국. 아이를 가질 수 없는/수태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뤄질까.
하나님이 엉터리라는 생각이 든다.
이삭을 얻고 난 다음에는. 더 엉터리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몇십년을 기다린 끝에. 드디어 이삭을 얻게 되었다.
그렇게 아들 이삭을 십여년 정도 키우며.
이제는 내 목숨보다. 아들 목숨이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라고 한다.
뭐 이런 엉터리가 다 있을까.
차라리. 처음부터. 아들을 주지 말든가.
줬다가 뺐어가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바치러 간다.
정말 엉터리 집안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엉터리로 느껴진다.
이게 신앙이고. 이게 믿음의 길이라면.
우리 가운데. 어느 누가. 하나님을 믿겠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믿음이라고. 써 놓고. '엉터리'라고 부르고 싶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이삭을 바치라고 할 것을 알았다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아들 이삭을 얻고 싶어했을까?
'하나님이 아들 이삭을 어느 때에 바치라고 할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일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는 있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도리어. 하루하루 걱정과 근심 속에 살았을 것이다.
때가 오기 전에. 아들 이삭을 도망치게 하였을 것이며.
그들의 인생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아이를 주기까지. 몇십년이 걸릴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이.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오랜 세월. 나그네와 방랑자로 살 것을 알았다면'
그들은.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도리어. 몰랐기에. 그들은 믿음으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약속을 향한 믿음으로 살아오다 보니.
몇십년을 기다리고. 버티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참 신기하고. 이상할 따름이다.
'엉터리'처럼 보이는 인생 속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고.
'엉터리'처럼 보이는 인생 속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엉터리 처럼 보이는. 우리 인생 속에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모든 것을 다 헤아릴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만. 신실하신 주님/선하신 주님을 바라며.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믿음의 발걸음을 뗄 뿐이다.
그렇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어떤 약속의 성취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실존 자체를 믿고 살아갔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바랐던 것처럼(10절)"
"사라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분임을 바랐던 것처럼(11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처럼(19절)"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고. 기뻐하며.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산 것이다.
바라기는.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삶도 그러하길 소원한다.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엉터리 같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는. 선하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오늘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처럼"
그 나라가. 아직 우리에게. 온전히 임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멀리서 그 나라를 바라보며. 기뻐하며 살아가길 소원한다.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에게 그런 믿음의 눈을 허락해 주시길. 소원한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자신있게 이 땅을 걸어가며.
주님의 마음으로. 이 땅을 섬기고. 다스리길 소원한다.
오늘 하루. 우리 모두에게. 그런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가득하길.
진심으로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