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사무엘하

2021.06.23(수) 삼하 20:23-21:14

The Sabbath 2021. 6. 23. 10:13

삼하 20:23-21:14

"응답하라 1994"라는 드라마를 보면.
남여 주인공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문제 - 다음 상황에서. 남자 친구의 올바른 대답은?

"자기야. 오늘 이사했는데.
문을 닫으면 페인트 냄새가 심해서.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문을 열면. 매연 때문에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문을 여는 게 좋겠나? 문을 닫는 게 좋겠나?"

이때 남자 주인공들은 이런 얘기를 한다.
"그래도 차라리 매연이 낫지 않나?"
"아니지. 문 닫고. 페인트가 낫지?"

그러자 여자 주인공은.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한다.
"둘 다 아니다.
정답은. OOO야. 괜찮니? 병원 가야 되는 거 아이가?"


그러자. 남자 주인공은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한다.

"지랄한다. 그게 뭔 뻘소리야?
지가 문을 열것인가. 닫을 것인가 물어봐 놓고서는.
뭔 염병할 소리하고 앉았대?"

우스갯 소리처럼 느껴지지만.
이것이. 남여가 보이는. 일반적인 차이 가운데 하나다.

남자는.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반면.
여자는. 문제 해결 이전에.
상대방에 대한 공감/헤아림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오늘 본문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 같다.

오늘 본문의 시작을 보면.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 동안 흉년이 들었다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 원인을.
"사울과 그의 집안이. 유다와 이스라엘만 편애하고.
기브온 사람들을. 미워하고. 멸시하며.
그들을 학대하고. 죽인 것 때문이라(삼하 21:1-2)"고 말한다.


그러자. 다윗은. "문제 해결"을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찾아간다.

"내가. 당신들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내가 '무엇으로' 당신들을 보상하여야. 당신들의 화/억울함이 풀리겠소?(3절)"

조금 아쉬운 답변이다.
왕으로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애도하는 것이.
먼저이지 않았을까?

그런 측면에서.
다윗의 모습이. 잘못되었다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살펴주지 못한 점이.
여러모로 아쉽고. 서운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피해자에 대한 공감보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지에. 모든 관심이 쏠려 있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기브온 사람들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다윗의 잘못된 물음 앞에. 잘못된 대답/응답을 한다.

그들은.
"사울의 집과 우리 집안 사이의 문제는.
은과 금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며서도.
"이스라엘 사람을 죽이고. 보복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모순적으로.
"사울의 자손 가운데. 남자 일곱을 넘겨 달라"고 말한다(삼하 21:4-6).

그들을 나무에 달아 죽임으로서.
그들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스라엘 사람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면서.
사울의 집안 사람. 일곱을 건내달라는 건 무슨 말인가?"
"잘못은. 사울이 저질렀는데.
왜 책임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져야 한단 말인가?"
"그들에게 책임을 묻고. 앙갚음을 하면.
그들이 받은 고통과 피해가. 회복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울분에 사로잡힌 그들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쉽게 납득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다.


하지만. 다윗은. 흔쾌히(?)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왜? 문제 해결이 중요했으니까.

그래서 다윗은. 요나단의 아들이었던. 므비보셋을 제외하고.
사울의 자손 가운데. 7명을 수소문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기브온 사람의 손에 넘겨주었다.

결국. 그들은 나무에 달려 죽었으며.
그들의 시신은. 봄(보리를 거둘 때)부터. 가을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신명기의 기록에 의하면.
나무에 달린 자는. 해가 지기 전에 내릴 것을 명하였건만.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살펴보지 않는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의 복수(?)를 하였으니.
그것으로 끝/문제 해결이었고.
다윗 또한.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 사항을 수용했으니.
그것으로 끝/문제 해결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재밌는 것은.
주님은. 다윗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윗 입장에선. 나름대로 열심히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고.
주님은.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남겨진 한 가지를.
'리스바'의 모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보면.
'다윗'도 그렇고. '기브온 사람들'도 그렇고.
어떻게 하면.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을까에만 집중하고 있다.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사과'를 표하는 것도 아니고.
죽은 이들을 위해 '애도'를 표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마지막을 끝까지 살펴주는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이제 이걸로 끝"하는 듯한 반응/태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리스바의 태도는 그렇지 않다.

그는.
"굵은 베로 만든 천을 가져다가. 바윗돌 위에 쳐놓고.
봄부터 가을까지. 홀로 그곳에 머물며.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끝까지 애도하였다.

낮에는 공중의 새가. 그 주검 위에 앉지 못하도록 하며.
밤에는 들짐승이. 그 주검 곁에. 얼씬도 하지 못하도록 하며.
홀로. 그 곁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그러자. 다윗이. 그제서야 각성하기 시작한다.

'문제 해결'보다 중요한 것은.
이 아픔/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애도하는 것이며.
그럴 때에만. 문제 해결의 방안/솔루션이 의미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다윗은 그제서야. 못다한 일을 시작한다.
사울의 유골을 불러오며. 요나단의 유골을 불러오며.
기브온 사람들의 손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장례를 치뤄주게 되었다.

그러자. 하나님도. 그제서야 반응을 하시는 것 같다.

"사울과 그의 집안의 잘못으로.
이스라엘에 3년 동안 흉년이 들었는데.
왕으로서. 이에 대한 올바른 행동은?"이라는 물음 앞에.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댓가로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진심어린 사과와 위로. 애도가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나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큰 것 같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경우. '문제 해결'을 위해. 몰두하는가?

하지만. 문제 해결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아니. 문제 해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것이다.

내가. 문제 해결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며.
그들의 슬픔과 눈물 가운데. 함께 거하며.
이들을 위해. 진심어린 위로와 애도를 표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책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많은 분들의 얼굴이.
머릿 속을 스쳐가는 것 같다.

리더로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돕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지만.

바라기는. 섣불리 문제를 해결하고.
설익은 정답을 제시하려고 애쓰기 보다.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진심으로 헤아리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 곁에 머무르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일까?
이 아침. 이 찬양이 계속 생각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감사와 기도.
두 손을 높이 들고. 주께 찬양하네"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작고. 연약하다 하더라도.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의 자비와 은혜만을 간절히 구하길 소원한다.

주께서 우리를 고쳐주시고.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며.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사.
주께서 이 땅을 긍휼히 돌봐주시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