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사사기

2022.08.04(목) 삿 11:12-28

The Sabbath 2022. 8. 4. 09:43

삿 11:12-28

입다는. 힘만 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지혜롭게.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입다의 모습이 그러하다.

실제로.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길르앗)을 쳐들어 와서.
"내 땅을 내 놓으라"고 협박하고. 겁박할 때.
입다가 했던 말이 무엇인가?

1) 먼저는. 이 땅이. 지리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암몬 사람'의 땅이 아니라. '아모리 사람'의 땅이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아모리 왕 시혼이. 우리에게 시비를 걸었고.
우리가 그들과 싸워서 이 땅을 얻은 것인데.
이게 어떻게. '암몬' 사람의 땅이냐는 것이다.
이에. 암몬 자손들이 할 말이 없다.
입다의 말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2) 입다가. 이 땅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두번째 근거는.
'신학적'인 이유이다.
실제로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우리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입다가 하는 말이.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모리 사람을 몰아내고.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왜 니들이 와서 시비를 거냐?"고 말을 건다.
"니들은. 니들 신인 그모스가 준 땅에 가서 살 것이지.
왜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에 와서. 이렇게 까불고. 깝치냐고 말을 한다.

3) 그러면서. 입다는. 암몬 자손들의 자존심을 살살 건드린다.
"니들이 감히.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보다도 낫다?"고 생각하냐며.
발락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그냥 조용히 찌그러지고. 그냥 조용히 살았는데.
왜 니들이 여기 와서 깝치냐고 말하고.

4) 이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려면. 전부터/예전부터 진작 말할 것이지.
지금까지. 3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런 제스처도 없던 인간들이.
왜 이제 와서.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오냐고. 입다는 항변한다.

이에. 암몬 자손의 왕은. 달리 할 말이 없다.
입다의 말이. 모두 맞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따박따박. 입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하고 있는데.
거기에 토를 달아서. 자기에게 유리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암몬 자손은. 입다가 자기에게 전하여 준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시하기로 하였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자기가 말리고 질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이 대화를 무시하고. 종결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입다의 말빨(?)이. 참 부럽고. 대단한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도 저렇게 말로 조지고. 입도 뻥긋 하지 못하게 할 수 있을까?
입다의 말빨이 참 훌륭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데. 말씀을 보다가.
이것이 단순히 입다의 말빨/지혜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누가복음을 보면.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에.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대답할까.
또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을. 바로 그 시각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다(눅 12:11-12)"

이것은. 우리의 지식과 지혜의 근원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람의 힘과 능력을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이 상황을 헤쳐가고. 벗어날 수 있는 말들을.
"생각나게 하시고. 할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도들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학문적으로. 지식적으로. 인간의 지혜로는.
도저히 쨉도 되지 않고. 상대도 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그들이 지혜롭게. 성령충만함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입다 또한 그러하다.
이게 어찌. 입다 개인의 힘과 지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게 어찌. 입다 개인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주께서. 입다에게. '그가 해야 할 말'을 생각나게 하시고.
주께서 입다에게. 성령 충만함 가운데. 그가 말씀하게 하심으로.
입다가. 암몬 자손들을. 말로 조지고. 그들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부러워할 것은.
'입다의 말빨'이 아니라.
입다 가운데 말씀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성령의 임재'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거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꿈꾸게 되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충만히 일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 나도 주님 앞에 나아가며.
'주님의 충만한 임재와. 그분의 깊은 사랑'이.
이 시간 나를 감싸고. 나를 덮어주시길 소원한다.

그리고. 주님 앞에 이 찬양을 드린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어린 양 예수 따라가는. 무리 되게 하소서.
성령의 충만한 임재 안에. 어둡던 우리 눈 밝아져서. 주를 보게 하소서.
당신의 겸손함. 당신의 거룩함. 당신의 정직함 우리에게 보이사.
내 안에 교만함. 내 안에 천박함. 내 안에 거짓됨. 모두 벗어버리고.
어린 양 예수 따라가는 무리 되게 하소서"

오늘 하루. 그 주님의 충만한 임재와 사랑 앞에.
어둡던 우리의 눈이 밝아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feat.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우리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