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9(금) 마 4:18-25
마 4:18-25
오늘 본문을 보면. 크게 2개의 단락으로 구분되어 있다.
앞부분은. 우리 주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는 장면이며.
뒷부분은. 예수의 기적과 기사를 보고.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쫓아오는 장면이다.
근데. 오늘 말씀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두 단락의 순서가 변경 되었다면 어땠을까?"
다시 말해서.
앞부분에. 우리 주님의 기적과 기사가 나오고.
그 다음에. 우리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왔다면.
제자들의 응답과 반응이. 어떻게 느껴졌을까?
아마도. 그랬다면.
그 의미와 목적이. 크게 반감되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수의 기적과 기사를 보고. 사람들이 따라가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도 그렇지 않은가.
은사 집회를 하고. 은사 운동을 하는 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고.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라다닌다.
왜냐하면. 그가 보여주는 기적과 기사가 너무 놀랍기 때문에.
그 신비로움에 매료 되어서. 그를 찾고 그를 따라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마중물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이것이 결코. 본질을 대신할 수 없다.
초자연적인 능력이. 우리의 병을 고치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결코 우리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으며.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 영혼을. 그것이 결코 다시 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주의 제자들이.
당신의 기적과 기사를 보지 않고.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반응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주의 말씀 앞에. 그들의 심령이 흔들리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는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드리고. 주의 말씀 앞에. 겸손히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이. 베드로와 안드레. 또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신 것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은사가 있었다"기 보다는.
그들이.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반응했다는 것에 더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우리 주님이. 수많은 사람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 말씀 앞에. 아무도 진중하게 반응하지 않았지만.
이들은. 그 주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드려 반응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응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의 부르심/응답은.
이후에 나오는 수많은 무리들의 반응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사람들은. 부스러기를 보고.
눈에 보이는 콩고물. 그 손의 능력에 관심이 있었다면.
제자들은. 우리 주님을 향해.
그 주님을 향한 관심과 갈망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무리'가 아닌. '제자들'과 같은 주의 백성되길 소망한다.
나는. 무엇을 보고 주님을 따라 가는가?
나는.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무리처럼' 주님의 일하심과 주님의 능력을 보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결과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처럼' 주님의 말씀 앞에. 그 주님의 말씀 앞에 반응하는 우리가 되면 좋겠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는 찬양의 고백처럼.
오늘 우리도. 그 주님의 말씀 앞에. 진실로 반응하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무리에서 제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