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3(화) 창 43:1-14
창 43:1-14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야곱의 모습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탓하고. 비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체념하고. 단념하는' 것이다.
1) 실제로.
"우리가 막내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다시는 곡식을 사지 못 할 것이라"는. 아들들의 말에.
야곱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게. 어째서. 아우가 있다는 말을 해가지고.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냐…"
야곱은. 이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이유를 자식들에게 돌리고 있다.
자식들 입장에선. 이 얘기가 얼마나 서운할까.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먼 길을 다녀왔건만. 수고했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고.
"어째서. 너희는 아우가 있다는 말을 해서. 나를 힘들게 하냐.
왜 일을 이 모양 이 꼴로 해가지고. 나를 힘들게 하냐"고 하고 있으니…
자식들 입장에선. 이 얘기가 못내 서운하고.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2) 더욱이 그동안 야곱이 했던 것이 무엇인가.
식충이였다. 그냥 먹고 마시는 것 뿐이었다.
아들들이. 곡식을 가지고 오자. 그냥 그것을 먹고만 있을 뿐이었지.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그렇기에. 밍기적거리는 야곱을 바라보며.
유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지 않았다면. 벌써 두 번도 더 다녀왔을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외면하고 있을 겁니까.
도대체 언제까지. 문제를 회피하고.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머뭇머뭇거리고. 체념하고 있을 겁니까!"
아들의 말에. 야곱은. 그제서야 이렇게 말한다.
"그래…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면. 이렇게 해라."
이것도 챙겨가고. 저것도 챙겨가고.
사람의 마음을 녹이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데는. 선물만한 것이 없다며.
이것 저것 챙겨주며. 그들을 보낸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그 사람 앞에 설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을 감동시켜서. 너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길 바란다."
그런데. 이 기도마저도.
그의 마음이 담겨있거나. 그의 의욕이 담겨있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 다음 말이. 너무 힘이 없고. 맥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가 거기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준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겠지.
근데.. 뭐… 그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 뭐… 난들 어떻게 하겠어"
누군가는 이 모습을.
야곱이 자족하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겸손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창세기 28장에서.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집에 갈 때.
그가 했던 기도가 무엇인가?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창 28:21-22)" 하지 않았던가.
그게. 야곱이고. 그게 야곱의 본성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얍복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때.
"당신이 내게 복을 주지 않으시면.
절대로 나를 지나갈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씨름하던 모습.
그게 야곱이지 않은가.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야곱이. 야곱답게 기도하려거든.
그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 하나님이 그동안 내 인생을 돌봐오셨던 것처럼.
우리 새끼들도. 꼭 살아서 돌아오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새끼들 못 돌아오면. 나 못 삽니다.
하나님. 우리 새끼들. 건강히 돌아오게만 해 주신다면.
나 무엇이든. 다 하오리다!"
근데. 오늘 야곱이 어떻게 기도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거기 남아 있는 아이와. 베냐민도.
너희와 함께 돌려 보내주신다면. 난 더 이상 바랄게 없겠지.
뭐 어떡하겠어. 어쩔 수 없지 뭐.
자식들을 잃게 되면 잃게 되는 것이지. 난들 어떻게 하겠어.."
그런 측면에서. 야곱의 이 기도는.
소망과 확신에 찬 기도가 아니라. 절망과 체념에 찬 기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길 바라고. 소망한다기 보다는.
형식적으로. 그냥 관념적으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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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야곱의 모습은.
참 부끄럽고. 모나고. 여러모로 실망스럽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근데. 오늘 말씀을 보면서. 계속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야곱을. 계속 이스라엘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본문까지만 하더라도.
'야곱'이 어쩌고 저쩌고. '야곱'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았던가.
근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스라엘'이 어쩌고 저쩌고. '이스라엘'이 어쩌고 저쩌고 이렇고 있다.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것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 못나고. 실망스러운 야곱이.
내가. 택하고. 약속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내가. 그의 실수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의 나라를 이어가며. 그와 약속을 이뤄갈 것이라는 말씀이며.
그가 아무리 잘못하고. 실수하고. 넘어진다 하더라도.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고. 오늘도 신실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힘과 위로를 준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을 탓하며.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자기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여전히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다.
우리의 기도가 부족하고.
우리가 기도가 연약하고.
우리의 기도가 미온적이고.
우리의 기도가 소망과 확신에 차 있기 보다.
때로는 절망과 체념과 한숨에 사로잡혀 있다 하더라도.
주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내가. 뭐라도 할 수 있어서.
내가. 뭐라도 했기 때문에. 주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한없이 부족하고. 또 연약하지만.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당신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또 우리를 인도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침. 말씀을 보는데.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 무릎을 꿇고. 겸손히 엎드리게 된다.
내가 무엇이라고. 주께서 나를 택하시고.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에게 이런 은혜를 주시는가.
그렇기에.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 감사의 노래를 드리며.
주님의 은혜를 찬양할 뿐이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 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며. 사랑을 베푸시는.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린다.
(feat. 은혜(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