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창세기

2022.05.13(금) 창 47:1-12

The Sabbath 2022. 5. 13. 09:00

창 47:1-12

아버지를 만나고.
요셉은. 자기 가족들을 소개하기 위해. 바로를 찾아갔다.
먼저는 형들 가운데. 다섯 명을 뽑아서. 그들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 자기 아버지 야곱을 소개하였다.

그러자. 바로가 이렇게 물었다.
"어르신. 어르신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랬더니. 야곱이 이렇게 말한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130년이니이다.
내 아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9절)"


근데. 이 말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굳이.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야곱은. 왜 이 말을 했을까?"
내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고생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러니. 나를 얕잡아 보지 말라는 건가?
나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하는 건가?"

공동번역을 보면. 야곱의 말이. 더 아쉽게 느껴진다.
"내가 이 세상을 떠돌기 시작한지 벌써 백삼십 년이 되었습니다.
내가 살아온 날이. 얼마 되지는 않으나.
살아온 나날이 온통. 궂은 일뿐이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야곱의 인생이. 온통 궂은 일뿐이었는가?
때때로. 형언할 수 없는. 은혜가 있었고.
야곱이. 자기 머리로. 잔꾀를 부리고. 이리저리 피할 때도.
주님은. 그런 야곱을 불쌍히 여기시고. 지금까지 그의 삶을 인도해 오셨다.

물론. 그의 인생이. 결코 평탄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험악한 세월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되돌아 보면.
그 시간을 통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야곱이. 이렇게 말했어야 하는게 옳은 게 아닌가.

"왕이시여. 내가 비록 험악한 세월을 보내왔지만.
주님의 은혜로. 지금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왕 앞에 선 것도 그렇습니다.
한 때는. 아들 요셉을 잃어버리고. 세상에 아무런 낙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오늘 이 자리에 제가 서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니. 이제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다.

"주님 앞에. 우리의 삶을 계수할 때. 우리는 주님께 뭐라고 말할 것인가?"
"사람들이 나에게. 당신의 삶이 어떠하였소?
당신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뭐라고 말하겠소?"라고 물어볼 때.
나는. 그 질문 앞에 뭐라고 말할 것인가?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현상"만 얘기하는. 반쪽짜리 대답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게 좋았던 시간. 아름다웠던 시간은 쏙 빼버리고.
내게 힘들었던 시간. 어려웠던 시간만 얘기하는.
반쪽짜리 신앙/반쪽짜리 고백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도리어.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
주께서 이 시간을 통해. 우리 인생을 어떻게 빚으시고. 이끌어오셨는지.
해석할 수 있는 눈이 있으면 좋겠고.
그 속에서. 우리 주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의 고백이 멈추지 않는.
그런 우리가 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시간. 이 찬양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그 주님을 향한. 감사의 고백과. 찬양의 고백이.
오늘 우리 삶에. 가득 흘러 넘치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은혜(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