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bbath 2022. 9. 28. 09:11

마 8:18-27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따라간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의 코스트를 지불하였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율법학자였다.
그는 이스라엘의 촉망 받는 율법학자로서.
어찌보면. 그의 미래는. 안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안정된 미래를 버리고. 예수님을 선택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도다"는 말을 듣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선 것이다.

또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아버지의 장례를 제쳐두고도. 예수님을 따라갔다.
이 사람은. 이 일로 인해. 가족들로부터 무슨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
"이런 쌍노무시키"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꼭 지금이어야 하냐? 그것도 못 기다려?" 라는 말을 들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이 치르게 두어라"는 예수님의 말을 듣고.
곧장. 그 길을 나섰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을 선택한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지불한. 그들의 코스트였던 것이다.


이쯤 되면. 그들의 인생에. 나름대로 복과 평안이 있었으면 한다.
뭐. 비록 큰 걸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님과 함께 있으면. 그 자체로 기쁘고. 그 자체로 즐거웠으면 한다.
이들 인생에 아무런 거침이 없고. 아무런 부침도 없었으면 한다.

하지만. 뒷 이야기를 보니. 마냥 그렇지가 않다.
그들이 배에 오르자 마자. 큰 풍랑이 일기 시작하였고.
이것은. 그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끌고 갔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노를 잡고. 물을 퍼내고.
어떻게든 무슨 수를 쓰고 있는데.
예수라는 사람은. 잠만 실컷 쳐 자고 있다.

이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주님. 살려 주십시오.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아마도. 제자들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예수께 말하였을 것이고.
그들의 눈에는. 원망스러운 눈길이 가득했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따라올 걸…' 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괜히 객기를 부렸다가. 여기서 객사하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 또한 들었을 것이다.

마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인 반응과 같다.
애굽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에.
애굽 군대가. 자기들을 뒤쫓아 오는 것을 보고.
"애굽에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여기 끌어냈냐?"며.
모세에게 대들고. 불평 불만을 터뜨리던. 그 백성들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어찌 보면. '성난 파도'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성난 민심/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당장. 예수를 잡아 삼키고. 죽이려는. 제자들의 마음 말이다.


이에. 예수께서.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씀하신다.
"왜들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없는 자들아!"

그러고선.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이내 바다가 잔잔해졌다.
방금 전만 하더라도. 미칠 듯이 자기를 삼키고. 자기를 죽이려고 하던 저 바다가.
한순간에. 삽시간에 조용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길길이 날 뛰던. 제자들의 마음도 잔잔해졌다.
그들은. 예수를 믿지 못하고. 예수께 성을 내고 화를 내던 모습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을 것이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그를 향한 신비와 경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기록된.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오늘 이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종종 일어난다.

실제로. 오늘 우리 믿음의 성격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많고 많은 말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냄비 근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은혜를 입고. 조금이라도 뭔가 잘 될 것 같으면.
금세라도.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조금이라도 일이 풀리지 않는 것 같고. 뭔가 막힌 감정이 들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금세 마음이 차가워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님은 뭐라 말씀하실까?

그분도. 참 답답하고. 안타까우실 것 같다.
"내가 이 놈들 하고. 같이 살아야 하나?" 싶고.
"내가 이 놈들하고. 3년 동안 동고동락 해야 하나?"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신다.

주께서 어떤 분이신지. 우리가 밝히 알고 깨달을 때까지.
그때까지 친히 기다려 주시고.
우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로. 또 우리 눈높이에 맞춰서.
친히. 말씀하고. 또 말씀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실까 싶다.

"재식아. 믿음이라는 것은 말이야. 화를 내지 않고. 네 필요를 정직히 구하는 거야.
기도도 그래.
눈앞에. 놓인 폭풍우를 바라보고. 우리의 감정이 흔들리고 요동치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니.
그건 인간으로서 가지는 당연한 감정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죽게 되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않냐?"고.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원망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니?
이미 너 혼자. 상황 판단하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고. 그게 무슨 기도겠니?

기도는. 정직히 우리의 마음을. 아뢰는 거고.
그것을. 나의 필요에 맞춰 구하는 거야.
만약. 그게 없다면. 그건 기도가 아니라. 땡깡을 부리는 거겠지.
그건 기도가 아니라. 기도라는 명목 속에서. 나를 협박하는 거겠지.
만약. 네가 보다 성숙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길 원한다면.
이것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정직한 나의 필요를 구하며. 나아가길 소원한다.

때때로. 하나님 앞에. 속상하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가 있겠지만.
오늘 우리 마음이.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내 감정대로 휩쓸리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고요한 바다처럼. 잔잔한 바다처럼 길들여지면 좋겠다.

그래서. 주께서. 저 성난 바다를 향해.
"잔잔하라"고 꾸짖으시며. 그 바다를 잠잠케 하셨던 것처럼.
주께서. 오늘 우리 마음을 향해서도. "잔잔하라"고 말씀해 주시면 좋겠고.
주님 안에서. 마음의 감사와 기쁨을 잃지 않는. 그런 하루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면 좋겠다.

오늘 하루. 그 주님의 사랑과 평안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온전히 선포되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구주여 광풍이 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