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2(화) 눅 17:26-37
눅 17:26-37
사람에겐. 누구나. 마지막이 있다.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이며.
흙에서 시작한 인간은. 언젠가 흙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을 살 것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가. 언젠가 죽겠지만.
"그것이 오늘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에 대한 임재의식과. 경각심이 사라질 때가 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이라고 해서.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오늘 이땅에 주어진 현실과 문제에만. 급급하게 대응하고.
거기 묻혀 살아가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마치. 노아 시대 사람들이.
오늘 당장. 내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데만 집중하였던 것처럼.
또 롯 시대.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는데만 익숙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날이. 우리에게. 갑자기 임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무엇을 위한 오늘인지. 누구를 위한 오늘인지" 기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겠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도 않는.
그런 어리석은 재판장처럼 살아갈 것이 아니라(눅 18:2).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람을 존중하며.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정말 하나님의 부르심과 유업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는데.
윤동주 시인의 <서시>라는 시가. 마음 한켠에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도시샤 대학에서.
일제시대. 어려운 삶의 환경과 자리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고민하고. 기도하던 윤동주.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삶의 자리/고민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노아처럼. 롯처럼. 또 윤동주처럼 살아가길 소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날이 언제 올 지 알지 못하지만.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방주를 지었던 노아처럼.
또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체없이 그 땅을 떠났던 롯처럼.
또.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고민하며.
하나님의 부르심과 뜻을 따라 살기 소망했던 윤동주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살아가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소원한다.
"보여지는 예배 아닌.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노래하는 찬양보다. 삶으로 고백되는 예배.
나를 위한 예배 아닌. 주님 뜻을 향한 예배.
내 맘과 정성 다하여서. 주 앞에 드려지는 예배.
주 앞에 엎드려 경배합니다. 온전한 예배. 내 맘의 예배.
내 모든 것 받기 합당하신 분.
주 앞에 엎드려 예배합니다. 나의 모든 삶. 나의 모든 뜻.
말씀 앞에 순종하는 삶의 예배. 드리기 원하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주를 온전히 예배하길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삶의 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