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열왕기하

2024.02.07(수) 왕하 8:16-24

The Sabbath 2024. 2. 7. 06:08

왕하 8:16-24

아합의 아들. 요람이.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에.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남유다를 다스리게 되었다.
32살에 왕이 되어. 8년 동안.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된 것이다.

근데. 이 때 남유다의 형편을 보면. 아주 형편이 없고. 어려운 때였다.
'에돔'과 '립나'가 유다를 반역하여. 정치적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유다는 에돔과의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고. 힘을 쓰지 못하였다.

여호람 왕이 목숨을 건진 것도 천운이었다.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출동시켜. 사일로 건너갔다가.
거기서 그만 에돔 군대에게 포위 당하게 되는데.
그는 어찌어찌 하다가. 운좋게 그곳을 뚫고 도망치게 되었다.
이에 군인들은. 혼비백산하여 집으로 도망쳤고.
이 일을 계기로. 여호람에 대한 신뢰와 믿음은.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니. 여호람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찌 편안히 살고. 안정되게 살 수 있었겠는가.
여호람 때에. 그들의 형편과 처지는. 매우 빈궁하고 어려운 때였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성경 기자가. 이스라엘이 이렇게 된 원인과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여호람이.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이와 같이 악한 일을 하였다"고 말이다.

실제로. 아합의 때에.
아합이 망하고. 북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인가?
아합이. 시돈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이세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가 섬기던 바알을 따라 섬겼으며.
바알을 숭배하고. 바알을 예배하곤 하였다.
급기야. 이스라엘 영토 안에. 바알 신전을 건축하고.
그곳에. 바알을 위한 제단을 쌓고.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어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 수 있었겠는가.

근데. 오늘 본문에서.
유다 왕 여호람이. 아합이 한 짓과 똑같은 짓을 벌이고 있다.
아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그가 섬기던 바알 신상과 우상을 남유다로 들여오고.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과 우상을 겸하여 섬기고 있으니.
이 어찌 하나님 보시기에. 좋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여호람은. 하나님을 떠나 그 길을 갔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섬겼으며.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계명을 따라서. 배우자를 선택하고. 그를 맞이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 마음에 합한 대로. 자기 마음에 끌리는 대로.
배우자를 선택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남유다가. 이와 같은 행동/결과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이 일을. 여호람 한 명의 넘겨짚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일이. <여호사밧이 아직 유다의 왕일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여호사밧이 아직도 유다의 왕일 때.
그 때.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는.
아들의 잘못과 악행을. 자기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살아 생전에. 아합과 그렇게 친밀하게 지내고. 짝짜꿍하더니(왕상 22장, 왕하 3장).
이제 와서. 어떻게 그(아합 가문)를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아들이 아합의 딸과 결혼한다고 할 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자기가 한 일. 전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오히려 좋아>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어차피. 막을 수 없는 일이고. 어차피 거스를 수 없는 일이라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북이스라엘과 친하게 지내고.
그들의 문화와 관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좋고 세련된 일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이 일로 인하여. 급격히 몰락하고 말았다.
그들이 아합 가문이 한 대로. 이스라엘 왕들이 간 길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 보시기에. 악하고.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오늘 이 땅에 벌어지는. 악과 죄의 관습들이.
어쩌다. 하루 아침에 벌어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것은 하루 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라.
오랫동안 우리 안에. 잘못된 생각과 관습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것이 습관이 되고. 문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작은 물줄기가. 오랫동안 흐르고 흐르면.
그것이 바위를 패고. 구멍을 뚫는 것처럼.
악한 죄와. 악한 습관들도. 그렇게 형성되고. 그렇게 길들여진다.

그리고. 나중에서야. 그제서야 깨닫게 된다.
"내가. 고양이 새끼를 키운 게 아니라.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변명을 하고.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뒤늦은 후회다.
이 모든 것은. 내가 자초한 일이고.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니고. 내 마음대로.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결국에는. 나를 잡아먹고. 우리를 넘어뜨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의 경고를.
우리는 귀담아 듣고. 귀기울여 들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2절에 말하기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고. 그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오늘 우리는. 어떤 삶의 습관과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가고 있을까?
"이 정도쯤"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주의 말씀을 따라. 바르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나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삶이.
아합의 길을 따라. 아합의 가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
주님 보시기에. 기쁘고 선하신 대로.
그 뜻대로 행하고. 그 뜻대로 걸어가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작은 일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필요하다.
작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부추기고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는 것이 필요하며.
오늘 우리 삶에. 바르지 않고. 정직하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것을 돌이키고. 그것을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기에.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며.
거기에는 수많은 반대와 저항 또한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며.
이것이야말로. 우리 주님이 바라시고. 소망하시는. 참된 길/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소원한다.

"수많은 무리들 줄지어. 그분을 보기 위해 따르네.
평범한 목수이신. 그분 앞에. 모든 무릎 꿇어 경배하네.

모든 문제들 하나하나. 죽음까지도 힘을 잃고.
생명의 근원 되신. 예수 이름 앞에. 모든 권세들 굴복하네.

예수 이름 높이세. 능력의 그 이름.
예수 이름 높이세. 구원의 그 이름.
예수 이름을 부르는 자. 예수 이름을 믿는 자.
예수 이름 앞에 나오는 자. 복이 있도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예수의 이름을 높이며.
예수의 이름을 경배하며.
예수의 이름을 따르는.
그런 복되고. 소망 넘치는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수많은 무리들 줄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