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31(목) 눅 15:25-32
눅 15:25-32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이 모습을 보고. 먼발치에서 그를 반기며. 뛰어갔지만.
첫째 아들은. 이 모습을 보고. 시큰둥한 모습이다.
아니. 화가 나서 빡친 것 같다.
집을 떠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무슨 면목으로.. 무슨 낯짝으로 집에 들어오냐고 쏘아 붙이고 싶다.
집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당당하게 자신만만하게 살아가던 인간이.
어려움이 닥치자… 코너에 몰리자… 그제서야 손을 내밀고 돌아오는 둘째의 모습이.
못 마땅하고. 화가 난다.
화가 나는 것은. 아버지에게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이놈이 뭘 잘했다고 그를 받아준단 말인가.
화를 내고. 때리고. 죗값을 치르게 해도 모자랄 판에.
무슨 잔치를 벌이고. 옷을 입혀준단 말인가.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집 밖에 머물러 있다.
"이럴 거면. 내가 차라리 집밖에 나가겠다"며.
화가 난 상태로. 굳은 얼굴로. 씩씩거리며 문 밖에 서 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조적인 모습이다.
한 사람은. 돌아온 아들에 대해. 환대와 열린 마음으로. 그를 받아주고 있지만.
또 다른 한 사람은. 돌아온 아들에 대해. 화와 분노로 그를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걸까?"
왜 이런 차이와. 다른 결과/반응이 나타나는 걸까?
말씀을 읽으며. 그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용서>의 문제. <받아들임>의 차이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실제로. 아들이 집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 아들이 얼마나 밉고 싫었겠는가.
지금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줬건만.
하루 아침에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 아들이. 얼마나 야속하고 싫었겠는가.
그래서. 아버지는. 집을 나가는 아들을 향해. 재산을 내주며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이놈의 손아. 니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봐라.
내 다시는 너를 보나 봐라.
여기 니가 그렇게 좋아하는 돈이 있으니. 이거 받고 어여 썩 꺼지거라.
다시는 니 얼굴도 보기 싫다."
그렇게.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화를 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는데.
하루 아침에. 자식을 잃고. 자식과 생이별을 하게 되었으니.
아버지의 가슴에. 응어리가 지고. 홧병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의 마음에. 홧병이 나고. 화가 더해지기 보다는.
자식을 향한. 긍휼한 마음과. 애타는 마음이 더해졌을 것 같다.
실제로 한번 생각해보자.
아버지가 나이가 들고. 연로해질수록. 그가 무엇을 간절히 기다렸겠는가?
그것은 다른게 아니라. 아들의 소식. 자식의 소식이었다.
"이제 내가 죽을 날이 멀지 않았고.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는데.
그 전에. 이 아들의 얼굴을 한번만 볼 수 있다면…"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었고. 이것이 아버지의 애타는 심정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원망과 복수의 마음보다는.
그를 향한. 애탐과 긍휼의 마음이 훨씬 더 컸다.
그래서 그는. 매일 문밖에 나가. 아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내 그를 받아주고 용납해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고. 버선발로 뛰어갈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체통"을 지키고. "체면"을 지키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상관이 되지 않았다.
죽었다가 살아온. 내 아들이 있는데. 이것을 어찌 그냥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첫째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동생을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보다는.
분노와 원망의 마음이 훨씬 컸다.
동생이 집을 떠난 다음부터.
이 집의 모든 일들을. 나혼자 도맡게 된 것도 싫었고.
동생이 집을 떠난 다음부터.
이 집의 분위기가. 장사지내는 것처럼. 슬프게 지내는 것도 싫었고.
아버지가. 동생을 향한 그리움과 슬픔 때문에.
늘 그를 기다리고. 늘 그를 생각하는 것도 싫었다.
"우리가 내쫓은 것도 아니고. 지가 지 발로 나갔는데.
왜 우리가 그놈의 새끼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고. 슬퍼해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첫째 아들 입장에서는. 동생을 생각하기만 하면. 화가 나고. 울분이 치밀어 올랐다.
동생과는 이미 의절한지 오래였고.
이놈의 새끼가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다리몽댕이를 분질러 놓고. 내쫓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근데. 아버지가. 이미 그를 받아주고 용납했다니.
아들 입장에서는. 그것을 차마 받아주고. 용인할 수 없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대조적인/반대의 모습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보며. 이런 생각과 질문을 해보게 된다.
"오늘 나는.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살아있는가.
아니면. 형의 분노와 원망의 마음이 살아있는가?"
인간적으로는. 나에게 어떤 해를 끼치고. 피해를 주었을 때.
그 사람을 쉽게 용납하고. 용인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베드로가 말했던 것처럼. "7번까지는" 그 사람을 참고 이해할지는 몰라도.
"7번이 넘어가면" 이제 나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그렇게 생각해 보니.
"7번까지도" 그를 헤아리고 용납하는 마음은 아닌 것 같다.
말 그대로. "참을 인자 3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는 말처럼.
그냥. 참고. 부글부글대는 속을. 뚜껑으로 꼭 누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7번이 넘어가는 순간. 폭발. 그야말로 대폭발을 하게 된다.
그간. 참고 참아왔던 것을. 한순간에 다 터뜨리게 되고.
바가지로 부을 것을. 대야에 담아다가. 한순간에 붓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이것은 용납도 아니고.
이것은 넓은 마음으로. 그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화를 참고 있는 것 뿐이며.
이것은 그를 향한. 용서와 용납.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내가.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사랑도 없고. 자비도 없고. 은혜도 없고. 긍휼도 없는. 오늘 내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안타깝고. 불쌍한 자인가.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가. 내 마음 가운데 온전히/가득 훌러넘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비를 모르는 자에게. 주께서 자비를 가르쳐 주시며.
사랑을 모르는 자에게. 주께서 사랑을 가르쳐 주시며.
용납을 모르는 자에게. 주께서 용납을 가르쳐 주시며.
긍휼을 모르는 자에게. 주께서 긍휼을 가르쳐 주시길 소망하면 말이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이 찬양의 고백이 마음 가운데. 계속 피어오르는 것 같다.
"사랑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사랑. 사랑. 사랑.
사랑을 네게 주노라."
오늘 하루. 주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