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 1:10-14
남유다가 멸망하던 날.
에돔은.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긍휼과 연민의 눈이 아니었다.
그들은 형제 이스라엘의 몰락을 기뻐했고.
바벨론이 떠난 다음.
이스라엘을 거덜내기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마치 하이에나 같다.
사자가 사냥(식사)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면.
그 사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하이에나.
비열한 그들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에. 오바댜 선지자가. 외친다.
"꼭. 그렇게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너희들 그렇게 하면 안 됐어"
이것이 에돔의 죄였다.
그들은 "교만"할 뿐만 아니라.
"비열한 기회주의자"였으며.
형제의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이기주의" 집단이었으며.
남유다의 멸망을 "반면교사" 삼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자신들 앞에 임박한 심판은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교만은. 헛된 자랑에 불과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명하신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 안에. 이러한 "비열함"이 있을까 두렵다.
실로. 세상은 이런 논리로 흘러가지 않는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 내가 승리하는"
결국에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하며.
개미지옥에서 혼자 살아남겠다며. 발버둥치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초대교회 선교의 가장 큰 동력이 "환대"에 있었다면.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눈 먼 자를 다시 보게하셨다면.
우리의 걸음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있기를 기도한다.
그들은. 우리의 "투쟁의 대상",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 우리의 가족이다.
그렇기에.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를 읽으며.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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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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