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아모스'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24.12.15 :: 2024.12.15(주일) 암 9:1-15
  2. 2024.12.14 :: 2024.12.14(토) 암 8:1-14
  3. 2024.12.13 :: 2024.12.13(금) 암 7:10-17

암 9:1-15

이스라엘을 향한. 마지막 심판이 이어진다.
“주께서 제단 곁에 서서. 그 기둥 머리를 깨뜨리겠다(1절)”고 말씀하신다.
지붕이 무너져 사람들을 삼키겠다고 말씀하신다.

산으로 도망친 사람은. 내가 거기서 그들을 잡아오겠다고 말씀하시고.
바다로 도망친 사람은. 내가 바다 괴물을 시켜서.
그들을 물어 죽이겠다고 말씀하신다(3절).

적군에게 사로잡혀 간 사람들은.
거기서 칼에 찔려 죽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며(4절).
이 땅의 모든 거민이. 주의 심판 앞에서.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아무 응답도 하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이 이렇게 살벌하게 말씀하시다니.

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의 말로였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는 백성이라”는.
그 약속 하나만 믿고 지금까지 까불었으며.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오만방자한 태도로 지금까지 걸어왔다.

그러니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찌 주의 심판이 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하나님이 너무한다”고 하였지만.
사실 세세히 알고 보면. 그들의 완악한 입술이 하나님의 입을 열게 하였으며.
그들의 완악한 손과 발과. 하나님의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하셨다.

너무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라 자부하며. 떵떵거리며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며.
그들은 하나님 앞에 까불고 함부로 살다가.
이와 같은 화/심판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찌 주의 자비/긍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의 마지막 말씀을 보면.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한가닥 희망을 열어두신다.

그것은. “그날이 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고.
다시 하나님과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 11절부터 15절을 보면.
우리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그 날이 오면. 내가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겠다.
그날이 오면. 내가 터진 울타리를 고치고. 그 허물어진 것들을 다시 일으켜주겠다.
그날이 오면. 농부는 곡식을 거두고. 곧바로 땅을 갈아야 할 것이며.
산마다 단 포도주가 나와서. 모든 언덕에 흘러 넘치게 될 것이다.

내가 사로잡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데리고 오고.
그들이 짠 포도주와 과일을 먹게 될 것이니.
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내가 이 백성을 그 땅에서 다시 살게 할 것이며.
내가 이 백성을 다시는 뿌리 뽑지 않게 하겠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것은. <그날이 언제>일지. 우리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회개할 것을 요하는 것이다.

<그날이 오면>이라고 하면서.
막연한 기대와. 장밋빛 전망. 희망 회로를 돌리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말 엎드리고. 회개하고 자복할 것을 요하는 것이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난 다음에.
그 아들을 살려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엎드려 기도했던 것처럼.
또 주께서 그 아들을 데려 가신다 하더라도. 나는 달리 할 말이 없다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기계적인 기도. 주의 자비만 바라는 기도’를 할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통애하고. 엎드려 간구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에 빗대어. 이렇게 기도하기를 원한다.

“주님.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형벌을 받기에. 합당한(?) 자니이다.
우리가 입술로는 주를 찬양한다 하였지만.
마음으로는 주를 멀리하며. 주를 반역하였나이다.

우리가 입술로는. 이 땅의 공의 정의. 평화를 사랑한다 하였지만.
우리는 악을 행하며. 죄를 짓기에. 손 빠른 사람이었으며.
그렇게 악을 행하고도.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뻔뻔하게 당당하게 살아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운운하는 것은. 정말 부끄럽고 민망한 일입니다.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자신있게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찌 하나님 앞에.
“주께서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하셨으니.
“우리에게 복을 달라”고 당당히 소리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고개도 들 수 없는. 민망한 죄인이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불쌍한 죄인. 긍휼한 죄인입니다.

주님. 그렇지만.
우리가 주님의 자비를 힘입어. 다시 한번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재를 뒤집어 쓰고 회개하며 기도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기 원합니다.
“혹시”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며.
“아들의 생명을 다시 돌아오게 하시지 않을까” 다윗이 간구하고 기대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기도하기 원합니다.

우리의 필요와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당당히 고개 들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고개들기도 부끄럽고.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부끄럽고 민망한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자비/당신의 긍휼을 빗대어.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을 따름입니다.

주님 그런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님 그런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의 날을 허락해 주시고.
다시 한번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주와 더불어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그런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을 드린다.

“나의 백성이 다 겸비하여. 내게 기도하며.
나의 얼굴을 구하여서. 그 악한 길 떠나면.
하늘에서 듣고. 죄를 사하며. 그들의 땅을 고치리라.
아버지여 고쳐주소서. 이 나라 주의 것 되게 하소서.
주 하나님 간절히 기도하오니. 상한 이 땅 새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자비를 베푸시며. 당신의 긍휼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사모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나의 백성이 다 겸비하여)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아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2.14(토) 암 8:1-14  (0) 2024.12.14
2024.12.13(금) 암 7:10-17  (0) 2024.12.13
2024.12.12(목) 암 7:1-9  (0) 2024.12.12
2024.12.11(수) 암 6:1-14  (0) 2024.12.11
2024.12.10(화) 암 5:18-27  (0) 2024.12.10
posted by The Sabbath
:

암 8:1-14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에 임하였다.
그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삶으로는 하나님을 반역/모반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의 종교적 외식과 거짓을. 아모스 선지자가 직접적으로 밝힌다.

"가난한 자를 삼키며. 힘없는 자들을 망하게 하며.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며. 거짓 저울로 사람들을 속이려 하며.
어떻게든 백성들을 쥐어짜서.
그들의 배를 채우고. 그들의 야욕을 이루려고 하는 자들(4-6절)"을.
주께서 어찌 가만 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주님은.
속임과 착무가 난무하는 세상 가운데서.
홍수로 그들을 싹 쓸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사회/정치/종교/문화/경제 등.
어디 하나 손보지 않을 곳 없기 때문에.
나일강이 범람하여 그 땅을 삼킨 것처럼.
오늘 이스라엘을 싹 쓸어버리고.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지진으로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땅이 갈라져. 그 땅을 삼키고 사람들을 삼켰던 것처럼.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심판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예언은 현실이 되었다.
2년 뒤 이스라엘은. 큰 지진을 맞고.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으며.
그들은 뒤늦은 탄식과 절규 속에. 살게 되었다.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길"
하나님 앞에 당부하고. 또 당부해보지만.
그것은 이미 버스가 떠나고 난 다음의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죄와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진노를 맞게 되었으며.
그들은 그제서야. 모든 노래를 그치고.
슬피 탄식하며. 이를 갈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함께 돌아보게 된다.

오늘 우리는. 임박한 주의 말씀/심판 앞에서.
어떤 삶의 자세와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아무런 두려움과 떨림 없이.
뜨뜨미지근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는가.
아니면 나침반이 정북을 가리키기 위해서.
끊임없이 떨리고. 흔들리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을 보고서도.
"평안하다. 평안하다" 거짓말만 외치는. 그런 거짓 선지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정직히 돌이키고 멈추는.
그런 진실한 주의 자녀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입술의 열매/제의적 예배만 가득한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삶 가운데. 삶의 예배가 있고. 진실한 삶이 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보고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고. 아무런 두려움 없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주께서 이 땅에 오셔서. 가난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과.
병든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살아가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게 하고. 주의 평화가 임하게 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당신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못해서.
기갈하고 곤고하여 넘어지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흥왕해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든든히 세워져가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 공동체가 세상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우리끼리. 나만 잘 살면 돼!” 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기득권의 복음으로.
불의한 세상과. 불의한 사람들 앞에.
침묵하고. 조용히 꼬리를 내빼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나의 아버지. 그 거룩한 사랑. 아들의 생명 보내주시어.
그 피로 주 앞에 나아가오니. 주 여호와여 구원하소서.

우리 안에 한 성령 부으사. 우리 사랑할 때 하나님 보게 하소서.
우리 앞에 선 저 푯대 향하여. 주 복음 위해 힘써 싸우겠네.

그날에 예수. 주 다시 오셔서. 하늘과 땅 모든 권세 위엄 나타내리니.
보좌 위 영광. 빛 흘러 넘쳐서. 우리 흘린 눈물 모두 새 찬양 되겠네.
그 날에"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그런 헛된 예배. 그런 헛된 성도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직 주님 안에서 결실을 맺고. 열매를 맺는.
그런 나의 삶.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이와 같은 은혜. 이와 같은 복 더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드린다.

(feat. 나의 아버지 그 거룩한 사랑)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아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2.15(주일) 암 9:1-15  (0) 2024.12.15
2024.12.13(금) 암 7:10-17  (0) 2024.12.13
2024.12.12(목) 암 7:1-9  (0) 2024.12.12
2024.12.11(수) 암 6:1-14  (0) 2024.12.11
2024.12.10(화) 암 5:18-27  (0) 2024.12.10
posted by The Sabbath
:

암 7:10-17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중에.
<아마샤>라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한다.
이 사람은 벧엘의 제사장으로서.
아마도 여로보암의 신복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아모스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왕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궁리하곤 했었다.


그래서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견자야. 너는 유대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13절)"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꺼지라>는 것이다.
아모스의 말이 듣기 싫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을 거짓말로 만들어 버리고.
그를 추방하고. 그를 이스라엘에서 끌어내려고 한 것이다.

이에 아모스 선지자가.
"나는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일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없어서. 내가 대신 이 말을 전하고 있다(14-15절)"고 말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이 땅에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요 모양 요 꼴이냐"고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요 모양 요 꼴이여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가 말하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17절)"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주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역하는 자의 말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정치적 반역자로 만들어 버리고.
오직 여로보암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주의 자녀이며. 선지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여로보암의 심복/개에 불과하였으며.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고. 정직한 길을 걷는 것보다.
자기 인생의 편안한 길. 빠른 길을 걷는데만 익숙한 자였다.

그러니. 그에게 어찌 하나님의 심판/형벌이 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선한 양심을 잃어버렸고. 결국 믿음에서 파선한 어떤 이들의 모습과 같았으며(딤전 1:19).
그의 마지막은. 참 비참하고. 비굴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곁에도. <아마샤>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고 하였지만.
정치권의 개가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자들이 있으며.
재벌가의 개가 되어서. 그들의 발을 핥아주고. 그들에게 꼬리치는 자들이 있다.

모 선교단체는. 불의한 정권과 야합하여.
땅을 받고. 그들의 독재와 그들의 불의를 옹호한 적도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불의한 정권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2022년 4월.
극동방송에서 교계 지도자들을 불러놓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그 모습이 얼마나 역하고. 추하게 느껴지던지.

정말 이분들은 윤석열이 대통령 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손에 “왕”자나 새기고. 주술의 힘을 믿으며.
거짓과 불의로 가득힌 자에게.
그에게 무슨 소망과 꿈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많은 교계/교단의 지도자들이.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내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고 하였고.
“앞으로 당신 인생 가운데. 주님의 복이 가득할
것이라“ 하였다.
이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프게 느껴지던지.

선교단체 대표로. 나 역시 그 자리에 초청을 받았지만.
나는 결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자리는. 들러리를 서는 자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였으며.
거기 참석하는 것은. 결국 거기 굴복하고. 거기에 침묵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슬픈 것은.
오늘 대한민국이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도자의 잘못을 감춰주고. 허물을 덮어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은 일이며.
이 어찌 수치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가진 자. 권력자와 빌붙은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앞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지난 역사가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나단 선지자>의 삶과 사역이 다시 한번 생각나는 것 같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범죄하였을 때.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를 해하였을 때.
다윗이 악을 행하고. 범죄하여도.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뭐라하지 않고. 참관하지 않을 때.
그때 나단 선지자가. 주의 말씀으로. 다윗을 훈계하고. 그를 교육하였던 것처럼.
나는 오늘 한국 교회가. 선지자의 외침을 회복하고.
선지자의 길로 바르게 살아가길 원한다.

오늘 우리 곁에.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케 하려는.
그런 거짓된 목소리. 그런 거짓된 삶을 그치고.
<누구 누구의 종. 누구누구의 딸랑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딸랑이>로 살아가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삶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가벼운 삶.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삶이. 주님 앞에 내실을 맺고. 결실을 맺는.
<진중한 삶. 열매 맺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아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아로리라"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의 상하고 깨어진 마음을 아시며.
오늘 우리 삶이. 주께 열납이 되며. 기쁨이 되길 원하며.
오늘 우리 삶이. 거짓 선지자와 같지 아니하며. 참 선지자가 되길 원하며.
오늘 우리 삶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종. 그의 딸랑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마음이.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그분의 딸랑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하길 원한다.

(feat.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아모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2.15(주일) 암 9:1-15  (0) 2024.12.15
2024.12.14(토) 암 8:1-14  (0) 2024.12.14
2024.12.12(목) 암 7:1-9  (0) 2024.12.12
2024.12.11(수) 암 6:1-14  (0) 2024.12.11
2024.12.10(화) 암 5:18-27  (0) 2024.12.10
posted by The Sabbat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