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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10.27 :: 2024.10.28(월) 애 5:11-22

애 5:11-22

예레미야 애가. 마지막 말씀이다.

예레미야는 불타버린 성읍을 보며. 탄식과 절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데.
이 모든 것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였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여.
그분을 멸시함으로 우리가 형벌을 받았는데.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따지고. 그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예레미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절망과 탄식으로 소리쳐 울 뿐이다.

한 때는. 천하를 호령하며. 이 땅을 다스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개털/빈털털이가 되어 버렸고.
한 때는.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자부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두려워하고 떨게 된 것이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그렇다.
특별히 오늘 본문 11절부터 14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대적들이 시온에서 부녀들을 잡아가고.
대적들이 유다 각 성읍에서 처녀들을 욕보이는데(11절)"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슬퍼하고 비탄에 빠졌겠는가.

지도자들은 그들의 손에 매달리고.
장로들의 얼굴은 존경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은 그를 업신여기고 무시하며(12절)

청년들은 맷돌을 지며. 아이들은 나무를 하다가 엎어지고.
노인들은 다시는 성문에 앉지 못하고.
청년들은 다시는 노래하지 못하는(13-14절).
이 슬프고 안타까운 역사를 보면서.
그들은 얼마나 탄식하며 절규 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유구무언/입이 있어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자업자득/우리의 죄 때문임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니.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진 것은.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15-16절)"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자비/인애를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에게 벌어진 일이. 우리의 잘못/죄 때문임을 잘 알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자비와 인애가 무궁하신 분이신 것을.
이 또한 알아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기도가 그렇지 않은가?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오며. 주의 보좌는 대대에 이르시는 분인데.
오늘 당신의 이름이 짓밟히는 것을. 언제까지 지켜보시고 외면하시겠습니까?(19절)

주님. 주님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겠다고 하셨으며.
주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지키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까지 우리를 잊으시고. 언제까지 우리를 버려두시겠나이까?(20절)

주께서 우리에게 돌이키시고. 주께서 우리에게 돌아오시면.
우리도 주께 돌아가겠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시고.
주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영광/당신의 은혜를 부어주시면.
우리가 다시는 주를 떠나지 않고.
다시는 주를 외면하지 않겠나이다(21절).

그러니. 주님 우리에게 돌이키시고.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주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오니(시 51:17).
주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런 측면에서. 예레미야의 기도는.
모세의 기도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고. 하나님을 시험할 때.
모세 또한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지 않았던가.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반역한 것은 맞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자비와 인애가 무궁하신 분 아니십니까?

우리가 광야 여정을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 앞에 계속 원망하고. 주께 시비를 건 것은 맞지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분의 임박한 진노/하나님의 형벌을 맞이해야 하는 것도 맞지만.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께서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주께서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하신 것도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 당신의 화와 진노를 거두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가 주님 앞에.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한 것은 맞지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달리 할 말이 없고.
이렇게 기도하고 간구하는 것도. 참 민망하고 안타깝기 짝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자비와 인애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무릎 꿇을 때.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내가 나의 모든 영광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네게 선포할 것"인데.
그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당신의 이름이 뭔가?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출 33:19)"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등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모세가. 그분의 성품/그분의 자비와 인애를 바라며.
주님께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애가 많은 분이심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헛점/그분의 빈틈(?)을 노려 공격/기도한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받고. 주의 자비/긍휼을 입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간구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어떠함. 우리의 자격>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주님의 자비. 주님의 긍휼>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얼굴도 내밀 수 없고. 명함 한 장조차 내밀기도 부끄러운.
민망한 죄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을 붙들고.
주님의 자비를 붙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세리가.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하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절규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또 동시에. 우리 주님은 사랑이 많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에.
삭개오가 뽕나무 위에 올라가서. 우리 주님을 기다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애하심을 기다리며.
주님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고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주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의 인애를 베풀어 주시길 원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이 찬양을 부르길 원한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나를 구원한 주의 십자가. 그것을 믿으며 가네.
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나 여전히 부족하나.
나를 품으신 주의 그 사랑. 그것을 믿으며 가네.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자격 없는 내 힘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사랑. 힘입어 나아갑니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십자가의 보혈. 완전하신 그분의 사랑을 믿으며.
오늘도 주님 앞에 엎드리고.
오늘도 겸손히 주의 자비를 바라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주님 앞에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예수 피를 힘입어(주의 보좌로 나아갈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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