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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27 ::
2025.05.28(수) 빌 3:1-11
빌 3:1-11
사도 바울은. 한 때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그는 유대교 신앙 안에서. 촉망 받던 지도자였으며.
배움과 행함에 있어서.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로.
정말 열과 성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그를 따르는 일에 앞장서곤 했었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서고 있었는데…
그랬던 사도 바울의 인생 가운데. 천지를 개벽할 만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행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9절을 보면.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고.
오직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열중하게 되는데.
사도는 이 시간을 보내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자기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주께서 사도 바울의 어두운 마음을 밝히시고.
그 마음 가운데 있는 비늘을 벗기시고. 깨닫게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은. 저주 받은 사람이 아니라.
그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독생자라는 사실을.
자기 마음으로. 깊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9장 20절을 보면.
"사도가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숙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고 말하는데.
이 소식을 듣고 모든 사람이. 놀라 자빠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여기 온 목적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결박하여. 대제사장에게 끌어가기 위함 때문이었는데.
사도가. 여기서 예수를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그를 전파하고 있으니.
이 일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과 공포로 다가왔겠는가.
하지만 사도는. 이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아무런 인식도 없고. 아무런 자각도 없었으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인생의 목적이 달라졌고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사도 바울의 회심>이라 말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것을 똑같이 고백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7절에서는. 사도가.
"이 모든 것이 내게 해롭고. 배설물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참 재밌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 타이틀을 얻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고. 그렇게 수고를 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에겐 이 모든 것이. 배설물과 같고. 해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사도 바울의 인식의 전환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지만. 사도 바울에겐 이것이 전혀 놀라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얻는 일에 있어서. 이 모든 것이.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내 모든 시간과 열정은. 오직 하나님께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정진해야 하는데.
오늘 나의 생각과 마음을. 다른 데로 빼앗기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어찌 내게 도움이 되고. 내게 유익이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게 하려 함이니(8-9절)>라고 하는데.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생 가운데. 가장 큰 기쁨/가장 큰 소망이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라고 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따르길 원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살기 원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분의 고난 가운데 참여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 생명의 신비를 맛보고자 하는 것.
이것이 사도 바울의 소망이고. 이것이 사도 바울의 목적이었는데…
그런 사도 바울의 삶을 보면서.
<광인>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나는 것 같다.
고 옥한흠 목사님이. 우리가 주의 제자가 되기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께 미치고. 그분 앞에 온전한 제자/광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가기 원하는가.
하나님 앞에. 적당히/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그를 따라가는.
베드로와 같은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명하는 곳을 가라"고 말씀하신.
우리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 길을 떠나고. 자기 아들을 바친. 아브라함과 같은 삶을 살 것인가?
말씀을 읽으며. 많은 물음과 질문을 우리가 함께 하게 되는데…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며. 예수 그리스도 앞에 온전히 우리의 삶을 드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아서.
그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자기 모든 것을 팔아서. 그 밭을 산다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기를 기뻐하는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음성 앞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우리 인생이 아니라.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고백했던 것처럼.
"내게 유익한던 것을. 내가 다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7-8절)"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가 주 안에서 발견되고. 주 안에서 기뻐하는(1, 9절).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내 안에 가장 귀한 것. 예수를 앎이라.
금 은 보다 더 귀한 것. 예수를 앎이라.
세상 지식보다 귀한 것. 예수를 앎이라.
내 안에 가장 귀한 것. 예수를 앎이라.
예수의 이름. 존귀한 그 이름.
예수의 이름. 능력의 그 이름"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예수의 이름으로 승리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내 안에 가장 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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