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오바댜'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9.11.30 :: 2019.11.30(토) 옵 1:15-21
  2. 2019.11.29 :: 2019.11.29(금) 옵 1:10-14
  3. 2019.11.28 :: 2019.11.28(목) 옵 1:1-9

옵 1:15-21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은.
"교육용"이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놈 매 하나 더 준다"는 말처럼.
이스라엘이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맴매하며. 혼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의 집 애가.
그것도 더 나쁜 놈이 와서. 내 새끼를 건드리니.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얼척 없었을까?

그렇기에. 하나님은. 에돔을 향해.
화를 참지 못하셨다.
"니가 뭔데 내 새끼 건드려. 내 자식은 내가 가르친다."

결국. 선을 넘은 에돔은.
더욱 엄중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원수의 눈 앞에서.
다시 "자녀됨의 권리"를 회복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아닐까?

미워서 때리지 않는다.
아무리 미워도 버릴 수가 없다.
혼내고 돌아서면. 안쓰럽고.
더 잘 해주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렇기에 부모가 원하는 것은 단 한가지다.
"내 새끼들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
"인간답게. 바르게. 또 건강하게 사는 것"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호 6:1)"는 말씀처럼.

주님의 책망과 훈계를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주님의 치료를 받기 원한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마르지 않았기에.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기에.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격려하고. 책망하신다."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오바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11.29(금) 옵 1:10-14  (0) 2019.11.29
2019.11.28(목) 옵 1:1-9  (0) 2019.11.28
posted by The Sabbath
:

옵 1:10-14

남유다가 멸망하던 날.
에돔은.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

긍휼과 연민의 눈이 아니었다.
그들은 형제 이스라엘의 몰락을 기뻐했고.
바벨론이 떠난 다음.
이스라엘을 거덜내기 위해서.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 웃었다.

마치 하이에나 같다.
사자가 사냥(식사)을 마치고 자리를 떠나면.
그 사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하이에나.
비열한 그들의 울음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이에. 오바댜 선지자가. 외친다.
"꼭. 그렇게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너희들 그렇게 하면 안 됐어"


이것이 에돔의 죄였다.

그들은 "교만"할 뿐만 아니라.
"비열한 기회주의자"였으며.
형제의 고통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이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이기주의" 집단이었으며.
남유다의 멸망을 "반면교사" 삼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자신들 앞에 임박한 심판은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교만은. 헛된 자랑에 불과한 것이었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엄중한 심판을 명하신다.


말씀을 보면서.
우리 안에. 이러한 "비열함"이 있을까 두렵다.

실로. 세상은 이런 논리로 흘러가지 않는가?
"네가 죽어야.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을 짓밟고 올라서야. 내가 승리하는"

결국에는. "제로섬(Zero-Sum)" 게임을 하며.
개미지옥에서 혼자 살아남겠다며. 발버둥치는 모습이.
우리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초대교회 선교의 가장 큰 동력이 "환대"에 있었다면.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며.
눈 먼 자를 다시 보게하셨다면.
우리의 걸음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있기를 기도한다.
그들은. 우리의 "투쟁의 대상",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 우리의 가족이다.

그렇기에. "성 프란시스코"의 기도를 읽으며.
오늘 하루를 시작한다.

---------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오바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11.30(토) 옵 1:15-21  (0) 2019.11.30
2019.11.28(목) 옵 1:1-9  (0) 2019.11.28
posted by The Sabbath
:

옵 1:1-9

에돔은. 사해 아래 위치한 나라로써.
고대 도시 "페트라"를 수도로 하였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촬영지였던. "페트라"
나도 작년에 운좋게 페트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이 시간을 통해.
그들의 문화/모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붉은 바위(암벽)위에 올라가 지내며.
군데군데 숨어있는 동굴 안에서 거주하였다.

더욱이. 페트라로 들어가는 길은. 좁디좁은 협곡이기에.
이곳은 적들의 공격을 막아내기 적합한.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나를 땅바닥으로 끌어내릴 수 있으랴"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에돔을 향해서. 이렇게 말하신다.

"나는 여러 민족 가운데 너를 가장 보잘 것 없이 만들겠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꾸민다 하여도.
내가 너를 거기에서 끌어내리고야 말겠다.
탈탈 털 것이다.
너와 동맹을 맺은 나라들이. 너를 속이고 너를 정복할 것이다.
내가. 에돔에서. 슬기로운 사람을 다 없애고.
에서의 방방곡곡에 지혜있는 사람을 남겨두지 않겠다."


요나서에서 묵상하였던.
"인자하고. 자비로운 하나님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고.
살벌한 하나님의 심판만이 남겨져 있다.

왜 그럴까?
니느웨와 에돔을 향한 하나님의 모습은.
왜 이렇게 다른 걸까?


그것은. "겸손함과 교만함"의 차이이다.

실제로. 에돔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떵떵거리며 살았다.
하나님의 심판. 그것쯤은 우습게 여겼고.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인양. 활개를 치고 다녔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말하냐면.
"너의 교만이 너를 속이고 있다(3절)"고 말한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인가.

그렇기에. 심판의 메시지를 듣고도.
돌이키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니느웨는 어땠는가?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40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망하리라"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엄중한 말씀 앞에.
돌이키고. 회개하였다.


이 차이다.
듣고. 돌이키느냐. 그렇지 않느냐.
회개하고. 돌이키는. 겸손한 마음을 가졌느냐.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가졌느냐.

나와 우리 공동체는 어떠할까?
우리는. 십자가의 미련함을 자랑하는. 겸손한 공동체일까?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겐 은혜를 베푸시는.
그런 하나님이시다(벧전 5:5)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오바댜'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11.30(토) 옵 1:15-21  (0) 2019.11.30
2019.11.29(금) 옵 1:10-14  (0) 2019.11.29
posted by The Sabbat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