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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11.25 :: 2024.11.25(월) 호 6:1-11
  2. 2024.11.19 :: 2024.11.19(화) 딤후 4:9-22
  3. 2024.11.18 :: 2024.11.18(월) 딤후 4:1-8

호 6:1-1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치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 6:1-3)"

우리는 때마다 이 말씀을 외친다.
수련회 때나. 부흥회 때나. 혹은 신년 사경회 때마다.
우리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그의 백성이 되고. 그의 자녀가 되길 원한다고 소리친다.

하지만. 우리의 다짐은. 작심삼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렇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호세아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그들이 왜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겠는가.
그들은 전심으로 돌이키고. 전심으로 주께 돌아오는 듯 하였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이 그것을 증명한다.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과 같으니.
내가 너희를 어떻게 하는 게 좋으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과 삶이 분리되었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다짐은.
아침 안개처럼. 쉽게 사라지고. 쉽게 흩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과 삶이 분리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의 눈물을 짓고 계시는데.
오늘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한. 그들의 영적 상황/그들의 현실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어떤 사람들은.
"회개"의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말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이다.
말이 아닌 행동이 중요하지. 말 뿐인 회개가 무슨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맞다! 우리가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말뿐인 회개가 아무 소용 없듯이.
고백없는 삶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다짐과 소망으로 살아가는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회개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회개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에 우리의 마음을 싣는 것이 중요하고.
고백 위에 우리의 삶을 더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에 성령을 더하고.
말씀 가운데 은혜를 더하며.
고백 가운데 삶의 열매와 거듭남을 더해갈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삶이.하나님 앞에 빛나고 밝게 비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삶이.
하나님 앞에 쉽게 흩어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이.<반석 위에 집>을 짓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율법의 말씀을 <돌판 위>에 새기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이 말씀을. <우리 마음 판 위>에 새기고.
<우리 마음 판> 가운데 뿌리를 내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숱한 다짐과 회개와.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분출해내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삶이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고 결실을 맺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내 백성이 나를 떠나. 돌아섰지만.
내 사랑이 내 백성은. 포기 못 하니.
내 모든 것 내어주고. 나 그들을 얻으리라.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돌아서도 그는 변치 않네.
여호와께 돌아가자. 우린 넘어져도 그 사랑 영원하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회개에 진심을 더하며. 삶에 뿌리를 내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드리길 원한다.

(feat. Love never fails)

posted by The Sabbath
:

딤후 4:9-22

국어사전을 보면. ‘초연하다’의 뜻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1) 사람이 어떤 일에 얽매이지 않고. 태연하거나 느긋하다.
2) 성품이나 기개 따위가. 보통의 수준보다 뛰어나다.

그래서. 우리는. ‘초연하다’는 말을 넣어. 이렇게 말한다.
“그는 마치 죽음에 대해. 초연한 듯이 말했다.”
“그분은 청빈을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초연한 성품을 지니신 분입니다.”

근데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사도 바울의 마지막 모습이. <초연>이라는 두 글자로 내게 다가왔다.

죽음 앞에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초연’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내게 놀라웠고(17-18절).
사도 바울을 멸시하고. 사람들이 그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초연’한 모습으로 그들을 대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이.
내게 놀랍고 신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16절).

그래서 질문이 들었다.
사도 바울은. 어쩜 이렇게. 초연한 모습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 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초연한 모습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이 사도 바울에게만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오늘 우리에게도 가능한 것인가?


그렇게 질문하고 말씀을 보는 가운데.
오늘 이것이. 어쩌면 우리 가운데 필요한. <삶의 성숙과 지향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실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며.
우리는 많은 오해와 억울한 일들을 겪게될 때가 있다.
사람들이 나를 떠나고. 비방할 때도 있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나를 비방하고 욕할 때도 있다.

그래서 때마다. 억울한 마음이 찾아올 때도 있고.
나를 변호하고. 나를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
욱한 마음을 참기도 하고. 상한 마음을 애써 눌러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참 쉽지 않다.
인생의 절망과 허무함이. 우리를 휩쓸고 가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 혼자 남아있는 것 같고.
아무도 내 마음을 헤아려주는 이 없고. 살펴주는 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때마다. 외로움과 상처와. 절망감과 거절감의 친구가 되곤 하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우리 삶의 성숙/신앙의 척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어려움을 견디다 못해. 신앙을 버리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런 상황 속에서. 그냥 순응하고. 움츠려들기도 하지만.
주께서 우리 가운데 바라는 것은.
<초연한 모습>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 나의 삶을 주께서 아시고.
오늘 나의 상하고 찢긴 마음을 주께서 헤아리시며.
오늘 우리의 삶과 고백을. 주께서 들으시며.
오늘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시고.
오늘 주께서 우리의 삶을 살펴주시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고백할 삶의 전부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 삶의. 참된 고백/초연한 삶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나에게 참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나는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나.
내가 그들을 증오하고. 내가 그들을 멸시할 필요가 없다.
주께서 이 모든 일을 아시며.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오늘 나는. 그 때를 기다리며. 하나님 앞에 조용히/잠잠히 머물러 있을 뿐이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을 온전히 이방인들이 듣게 되었고.
또 내가 그분의 은혜와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사자의 입에서 건져냄을 받았으니.
주께서 나를 이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나라.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하시리라.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노라.
영광 찬송 감사 고백이. 오직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을지어니.
나는 그분의 종이며. 나는 그분의 백성이다.

부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였던 것처럼.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나도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때때로 오늘 우리 삶에.
헤아릴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찬양하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삶을 감찰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초연해지는.
그런 나의 삶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하갈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브엘라 해로이 - 내가 이곳에서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스데반이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우리 주님을 보고 감사했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삶의 여러 순간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초연함을 잃지 않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곁에 계시네.
향기론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 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 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우리 가운데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오늘도 우리 삶을 감찰하시고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흔들리지 않는 초연한 믿음으로 살아가며.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길.
주님 앞에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드리길 원한다.

(feat. 날 구원하신 주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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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딤후 4:1-8

사도 바울은. 당시 시대를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이 있으나. 아버지는 많은 시대(고전 4:15)”라고 하였다.

아버지라면…
그 아이의 잘못됨을 꾸짖고. 호되게 가르칠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고 싶은 소리를 하며. 좋은(?) 가르침을 전파하며.

아버지라면…
그 아이의 잘못됨을 알고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를 기다릴 텐데.
그렇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를 버리고. 쉽게 그를 포기하곤 한다.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야말로. ‘고용’된 사람일 뿐인데.
내가 왜 책임지고. 내가 왜 돌봐야 한단 말인가.

그래서 그 당시. 많은 가르침과 교훈을 전하는 자가 있었지만.
참된 가르침과 본을 보이는 교사는. 많이 없었다.

그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저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고.
그렇게 삯군과 거짓 교사가 넘쳐나던 시기.
그 시기가 바로. 사도 바울이 살던 때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아버지’보다 ‘거짓 교사’를 찾기 시작했다.

머리로는. ‘아버지’가 좋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받아들이질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랑 같이 있으면 피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욕심에 끌린 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게 되었는데(딤후 3:6-7).
그렇게 그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귀를 가리게 되었다(딤후 4:3).

자기 사욕을 따를. ‘많은’ 스승을 두게 되었고.
또 귀를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게 되었다.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이 사람에게 이 얘기를 듣다가. 마음에 안들면 그 사람을 버리고.
또 저 사람에게 저 얘기를 듣다가. 마음에 안들면 또 버리고.
그렇게 돌고도는 삶을 살고 있으니. 그가 어찌 진리에 이를 수 있겠는가.

그에게 진리의 말씀은. 그냥 장식구/치장거리에 불과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생각하였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판단하는데.
그에게 진리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이런 시대 속에서.
디모데가. <살아있는 목회자/진실한 목회자>가 되길 바란다.

그냥 ‘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
‘많은’ 스승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목사가 되고. ‘진짜’ 목회자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해.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내가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엄숙히 명령하노니.
그대는 말씀을 끝까지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힘쓰십시오.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또 권면하십시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지 않으려 하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찾으며.
자기네 욕심에 맞춰서. 자기 입맛에 맞는 스승을 모아들일 것이지만.
당신은 이 모든 일에 정신을 차려서.
끝까지 고난을 참으며. 그대의 일/전도자의 직무를 완수하십시오.

나는. 이 모든 싸움을. 정말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달려왔습니다.
나는 부끄러움이 없고. 나는 후회가 없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주께서. 나를 위한. 의의 면류관을 준비해 두었을 겁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이 일이 나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당신에게. 다시 한번 권면합니다.
그대는 말씀을 끝까지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힘써 이 말씀을 전하며.
끝까지 참고 가르치면서. 책망하고 경계하고. 또 권면하십시오.
이것이 그대를 향한. 나의 마지막 권면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이 말씀이.
나의 가슴을 뛰게 하고. 나의 심장을 요동치게 하는 것 같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있고.
오늘날 많은 영적 지도자/스승이 있는데.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오늘 나도.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그런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길을 찾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될 것인가?

목회를 하다보면. 여러 일과 어려움이 찾아오게 될 터인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말씀을 전하고. 증거하는 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상황이 어렵고 힘들다고 하여.
쉽게 포기하고 쉽게 돌아서는 자가 될 것인가?

이제 이번달 말이면. IVF 간사를 사임하고.
지역 교회 목회자로. 풀타임으로 사역을 하게 될 터인데.
오늘 나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진짜’ 목회자가 되고. ‘진짜’ 사역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나님의 말씀을. 허투루 전하고 가르치는.
그런 목회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살아내는.
그런 목회자 되고. 그런 참된 아비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 영혼을 마음 다해 사랑하는. 그런 목회자 되었으면 좋겠고.
온유함과 진실함으로. 끝까지 참고 기다리는.
그런 목회자 되고. 그런 영적 아비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나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교회. 오늘 우리 공동체 속에도.
이와 같은 자들이. 충만히 흘러 넘치면 좋겠다.

오늘날. 어찌 목사만. 가르치는 자/말씀을 전하는 자가 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모든 사람이 주의 말씀/당신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힘쓰고 또 기억해야 할 것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주의 말씀을 배우고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힘쓰고 전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싸움/이 길을 마치기까지.
우리가 힘써 이 길을. 기쁨으로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오늘 우리의 삶이.
주님 앞에 예배가 되고. 전제가 되는.
그런 나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믿음의 동역자/우리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 찬양의 고백이 계속 생각나는 것 같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저들 대답하였다.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기쁨으로 그 길에 오르며.

주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고.
당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기르신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당신을 말씀으로. 사람을 낳고. 살리는. 그런 복된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기쁨이 되고. 소망이 되는.
그런 복된 공동체. 그런 진실한 주의 자녀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온전히 주께 맡겨드리길 원한다.

(feat. 십자가를 질 수 있나)


posted by The Sab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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