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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6.14 :: 2022.06.14(화) 벧후 2:11-22
벧후 3:14-18
웃음은.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적절한 농담 한마디는. 잔뜩 긴장한 사람에게.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고.
그의 마음을 위로하고. 때론 격려해 주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위트와 조크는 중요하다.
상담이라는 것이.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공간을 넓혀주는 것이기 때문에.
적절한 말/농담 한마디가. 때론 우리 마음에 큰 힘과 여유를 갖다 주기도 한다.
나는. 그것이 유머에 담긴 힘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베드로가. 그런 농담/위트를 던지는 것 같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보면. 좀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바울이.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개 했죠.
종말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개 했습니다.
근데. 솔직히 바울이 하는 말이 좀 어렵지 않습니까?
이 친구 똑똑하고. 훌륭한 건 맞는데. 너무 말을 어렵게 하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바울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잘못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떤 측면에선. 그건 바울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왜. 쉽게 얘기하지 않고. 어렵게 얘기해 가지고 말이야~
근데 여러분. 이제 제가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았습니까?
주님이 오시지 않는 것은. 그분이 올 생각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이 아직 오시지 않은 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오래참음이 크시기 때문이며.
주님은. 우리가 마음을 돌이켜. 당신에게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이. 기다리고. 참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니 여러분.
여러분은 거짓 사도들의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그들의 말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오히려. 이 진리의 기둥과 터에 굳게 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은혜 안에서. 담대히 자라가길 소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제 마지막 소원/바람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베드로 사도가.
어떤 얼굴(표정)로. 이 말을 하고 있을지. 한번 상상해 본다.
아마 그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있었을 것이며.
아마. 그 얼굴에는. 작은 여유가 있었을 것이며.
아마. 그 얼굴에는. 지체들을 향한. 굳은 신뢰와 확신이 있었을 것이며.
아마 그 얼굴에는. 형제자매를 향한. 사랑과 인자한 미소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여유와 사랑 위에.
베드로 사도는. 진리에 대한 확신과 담대한 마음으로.
이 편지를 기록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베드로 사도의 넓은 품/어른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내 모습도. 베드로 사도의 모습을 닮아가면 좋겠다.
제자들이. 거친 폭풍우를 바라보며. 두려움과 혼란 가운데 놓여 있을 때.
우리 주님이 그들을 향해. "나니.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던 것처럼.
내 삶이.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고. 보호가 되는.
그런 사람이 되면 좋겠고.
세상을 향한 불안과 염려 때문에.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고. 이리저리 안절부절 하는 사람들에게.
내 존재가. 그들의 마음에. 쉼을 주고. 힘을 불어넣어주는.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부드럽고 온유한 마음으로. 진리에 대해.
분명하게/확신있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고.
오늘 내 삶이. 우리 주님의 모습을 닮아가며.
어머니의 품처럼. 또 아버지의 품처럼.
그렇게 넓고. 따뜻하고. 포근하면 좋겠다.
그것이. 오늘 내 삶을 향한. 한 가지 기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며.
이 기도를 올려 드린다.
"주님. 오늘 내 삶이. 주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맺는 하루되게 하여 주십시오.
주께서. 이 땅을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와 사랑을 알려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그런 공동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설교라는 것이. 또 말씀이라는 것이.
흔들리는 사람은. 굳게 세워지고.
굳게 서 있는 사람은. 흔드는 것이라 배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곁에.
불안함과 두려움에. 흔들리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의 말씀으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세우는 사람되게 하여 주십시오.
혹시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붙잡고.
그것에 만족하고. 그것에 안주하는 사람이 있다면.
혹시 오늘 우리의 삶이. 거짓 진리 가운데. 머물러 있다면.
주님.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흔드시고.
우리를 당신의 진리 위에 굳게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우리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주시고.
오직 우리의 삶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진리와. 사랑과 은혜 안에서.
굳게 자라가며. 열매맺는 오늘 우리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그런 은혜와 사랑 부어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feat. 주 내 소망은 주 더 알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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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3:1-13
같은 말을. 두번 세번. 네번 하는 것은.
참 피곤하고 번거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을 감당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또 인내하는 것이기에.
지금 당장. 어떤 변화가 주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언젠가 변화되고. 성화될 것을 믿으며.
그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며. 그것이 사랑의 현 주소이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사랑장)에서.
사랑을 정의하며. 이렇게 고백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그리고. 사랑에 대한 특징을 정리하며.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참 재미있지 않은가.
3절부터 6절까지. 비록 4절 밖에 되지 않는데.
그 가운데. 참고. 참고. 참고. 또 참는다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을 보니.
사랑은. 정말. 수고롭고. 번거로운 일인 것 같다.
근데. 바울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베드로도 그렇고.
그 수고와 번거로움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너희를 얻기 위해서라면"
이런 수고와 어려움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절에. 이와 같이 이야기한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그리고. 베드로도 오늘 본문에서 이와 같이 얘기한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이 편지를 <두번째>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이 전혀 번거롭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편지를 통해.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고.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을 일깨울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이 일을 감당하겠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거짓 사도의 가르침과. 교훈을 따르지 말고.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가르침과 교훈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이.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그분의 오심이.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우리 주님은. 반드시 오시고. 곧 오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으니.
여러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으로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나라를 향한. 성도의 부르심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의 삶을 돌아본다.
나는.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을 즐거워하나?
나는.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즐거워하나?
나는. 같은 말을 여러번씩 하면서도. 온유하고 친절한 마음을 잃지 않는가.
아니면. 바로바로 되지 않는다고.
아까했던 말을 똑같이 몇번씩 해야 하냐고.
버럭버럭되며. 짜증을 부리는가?
사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런 번거로움과 수고로움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 정도면 괜찮겠죠? 일곱 번이면 많이 참았다 아입니까?"
베드로는. 나름대로 많이 참았다 생각했을 것이고.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근데 이 질문에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참. 어렵다.
참을 인자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 하였건만.
일곱번이면. 이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그런데.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니.
그렇기에. 이 시간. 주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나아갈 뿐이다.
이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오직 주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 마음에 가득 채워지기를 바랄 뿐이며.
그 주님의 은혜가. 우리 심령을 다스리고. 인도해 주시길.
주님 앞에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 이 찬양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
"주의 마음을 내게 주소서.
********한. 주의 친구들을 사랑하도록.
주의 자비를 내게 주소서.
********한. 주의 친구들을 사랑하도록.
주의 사랑은 외로움에 갇힌 자 놓아주는 참 자유이며.
주의 진리는 거짓을 부끄럽게 하는 진정한 힘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이 찬양이 계속 마음에 떠오르는데.
하도 오래된 찬양이기도 하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찬양이라.
가사도. 악보도. 동영상도 검색이 안 되네요.ㅎㅎ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feat. 주의 마음을 내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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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후 2:11-22
오늘 본문을 보면. 거짓 교사의 특징에 대해.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다.
1) 그들은 지각 없는 짐승과 같고.
2) 그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면서.
천지분간을 하지 못하고.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3) 흥청대면서. 먹고 마시는 것을 낙으로 생각하고.
4)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도.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을 속여 먹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형제자매를 관계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목적/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5) 형제자매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성적 노리개/간음할 상대로만 생각하고.
6)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약속하고.
내가 너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허무맹랑하게 큰 소리치지만.
그들은. 타락한 종이 되어. 스스로 종노릇하고 살아가고…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지.
베드로 사도는.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옛 속담에. 틀린 말이 하나도 없더구나.
잠언 26장 11절에 기록된 것처럼.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며>
<돼지가 몸을 씻고. 다시 진흙탕에 뒹군다>고 하던데.
오늘 그들의 모습이. 똑같구나.
하지만. 어쩌겠냐. 아무리 말을 해도 알아듣지를 않는데.
오히려. 자기들이 맞다고. 바락바락/바득바득 대드는데.
그 친구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
그들의 결국은. 더 나빠질 것이니.
그들은. 물 없는 샘이요. 폭풍에 밀려가는 안개와 같으니.
그들의 결국은. 캄캄한 어둠만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심각한 두려움을 안겨준다.
나는. 개뿔도 알지 못하면서.
세상 모든 지식과 이치를 깨달은 것처럼.
오만하고. 교만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형제자매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나의 목적과 필요를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목사로서/간사로서/대표로서. 내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겸손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혹시. 다른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고.
나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나는. 나의 형편과 처지를 깨닫지 못하고.
내 마음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 급급하고.
이전의 생활과 관습으로 돌아가며.
내 마음의 헛헛함을 채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며.
주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며. 이렇게 간구하며. 기도할 뿐이다.
"주님.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였던.
사도 바울의 권면을 생각합니다.
주님. 오늘 우리 인생이 그러하게 하여 주십시오.
어찌 우리가. 스스로 선 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찌 우리가. 학자의 혀를 가졌고.
어찌 우리가. 스승의 자리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가르치고.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오니.
우리가 하나님의 위치를 가로채고. 하나님의 자리에 서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마음의 겸손함을 잃지 아니하고.
마음의 순종을 잃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오직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낙/복이 되게 하여주시고.
우리 형편이. 이전보다 더 나빠지고. 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이. 우리 주님을 닮아가며.
당신 안에서. 아름다운 인격과 신앙의 열매를 맺어가는.
그런 삶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가 주님의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고.
오늘 하루. 우리 삶의 자리자리마다.
이 말씀이 열매 맺히고. 뿌리 내리고. 깊이깊이 자라가는.
그런 우리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를. 온전히 주께 의탁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feat. 주 내 소망은 주 더 알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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