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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41-44
오늘 본문은. 잘 아는 이야기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재산(두 렙돈)을 헌금하고. 주님을 예배하는데.
이 모습을 우리 주님이. 칭찬(?)하는 것 처럼 말하고 있다.
부자들은.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 떼어 헌금을 하였지만.
과부는 자기가 가진 모든 것. 전재산을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볼 때마다.
과부의 믿음. 과부의 신앙을 칭찬하곤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슬픈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당시. 과부들에게는. 재산에 대한 소유권이 없어.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그 재산을 대신 맡아주곤 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재산을 잘 관리해 준 것이 아니라.
착복하고. 빼앗는 일들이 더러 있었다.
헌금은 얼마씩 하라고. 헌금 액수를 지정해 주기도 하고.
물건을 거래할 때에. 잘못된 정보를 주기도 하고.
그렇게 과부의 재산을 탐닉하고. 빼앗다가.
이제 과부의 손에는. 동전 두 닢. 두 렙돈 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참 슬픈 일이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돌봄받아야 할 사람이.
어찌 이리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는단 말인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는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우선적인 역할/의무인데.
어찌 그들을 괴롭히고. 등쳐먹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은.
"칭찬"의 목소리를 넘어. "한탄"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부정과 거짓을 드러내신 것이며.
과부의 마음 가운데 있는.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과부의 마음을. 아무도 모르고. 아무런 관심도 없었지만.
우리 주님은. 그의 속사정을. 다 헤아려 보고 계셨고.
그의 눈물과 아픔의 기도를 받으면서.
동시에. 그를 위로하고. 그를 붙들어 주려 한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헌금함에 돈을 넣은 사람 가운데.
이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
모두 다 넉넉한 데서 얼마씩을 떼어 넣었지만.
이 과부는 가난한 가운데서. 가진 것 모두. 곧 자기 생활비 전부를 털어 넣었다."
근데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이 과부의 믿음. 그의 속마음에 관심이 가게 되었다.
실제로. 과부의 속사정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위험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돌봐주는 이 없는 것 같았고.
그는 철저히 외롭게.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과부가 그걸 몰랐을까?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탐닉하는 걸 몰랐을까?
자기 등골은 휘어져 가는데.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등은. 따뜻해지고.
자신의 옷과 살림살이는 누추해져 가는데.
그들의 옷과 살림살이는. 더 화려해져 가고.
이런 상황 속에서. 과부가.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을. 그가 정말 몰랐을까?
아니다.
내 생각엔 알았을 것 같다.
알아도 너무 잘 알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하나님을 저주(?)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헌금하고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과부 안에 있는. 진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세상이 나를 속이고. 세상이 나를 해하려 한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고.
오늘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오늘 내가 해를 입는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이. 억울한 일을 갚으시고.
주께서 모든 일을 드러내시고. 주께서 모든 일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믿음과 소망이 있었던 것 같다.
마치.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과부가 불의한 재판장 앞에 나아가.
계속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탄원하였던 것처럼.
오늘 이 과부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주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탄원하고. 간곡히 외쳤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주님이.
"이 가난한 과부는.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의 헌금을 가지고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주님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진실한 믿음. 그의 진실한 소망을 보았으며.
그렇기에 주님은. 그를 칭찬하시고. 그의 믿음을 높이 사시는 게 아닌가 싶다.
어려운 중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우리 주님을 향한. 신실함을 잃지 않고.
주께서 모든 것을 드러내시고.
주께서 우리의 아픔/고통을. 위로해주시고 탄원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의 믿음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과부의 믿음 앞에. 오늘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 보인다.
과부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고.
순수한 마음으로.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는데.
오늘 우리는 어떠할까?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과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참담함을 고백하며.
눈물로서 자신의 삶을 아뢰고 있는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절실한 믿음/절박한 믿음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상실과 배신감으로.
주를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고. 주를 향한 원망과 상처로 살아가고 있는가?
누구나 원망하고. 불평하고. 쓴 소리를 내기는 쉽지만.
그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참 쉽지 않은 것 같다.
근데 우리 주님은. 그 상황 속에서.
모두가 가는. <넓고 편안한 길>로 가길 원치 않으시는 것 같고.
오늘 우리가. <좁고 험한 길>로 가길 원하시는 것 같다.
오늘 우리의 인생 길이. 좁고 험하다 하더라도.
그 길 가운데 우리 주님이 계시면.
그 길은. 생명의 길. 면류관의 길이 되는 것이며.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그 길이 아무리 넓고 평탄하다 하더라도.
그 길 가운데. 우리 주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그 길은. 사망의 길. 어둠의 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과부의 믿음을 배우고. 과부의 진실함을 따르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삶의 어려운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을 져버리지 않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히려 그런 상황 속에서.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께 붙잡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둠 가운데 빛이 더 빛나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이물질을 품은 조개가. 그것을 진주로 바꾸고. 보석으로 바뀌는 것처럼.
오늘 주께서 우리 공동체의 삶을 그렇게 빚어주시고.
오늘 나의 삶을. 그렇게 빚어주시길 기도한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시리.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 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시리"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또 이 땅 가운데. 슬픔과 탄식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살아가는.
모든 자들 가운데.
주께서 은혜 주시고. 주께서 힘 주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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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38-40
마태복음 5장을 보면. 그 유명한 "8복"이 나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이렇게 우리 주님이 8복을 얘기하시는데.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그것과 상반되게. "7화"에 대해 얘기하신다.
그것은 "화 있을진저"라고 얘기하며.
주께서 싫어하시는 것. 주께서 심히 가증스럽게 여기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구절이 뭐냐면?
<외식하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23장 1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그리고 15절과 23절, 25절과 27절 그리고 29절에서도 똑같이 기록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것은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핵심적인 죄악이.
<외식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그럴듯 하게 살아가지만.
그들의 실상은. 회칠한 무덤처럼. 썪은 냄새가 나고. 온갖 더러운 오물로 가득한 삶.
그것이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실상이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의 허물/죄악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지도자 아래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얼마나 불쌍했는지 모른다.
주께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입히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언제나.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목을 추리는데 우선순위를 두었으며.
목자가 아닌. 삯꾼과 같은 삶을 살았으니.
백성들의 형편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그들의 외식을 삼가고. 그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과 가까이 하다가는. 오히려 해를 당하기 십상이니.
그들과 멀리 하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이 사람들 눈에 보이는 대로. 사람들 마음에 흡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그들은 자기가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로부터 이미 수많은 칭찬과 우러러봄을 받았으니.
"내가 그들에게 내릴 상과 칭찬"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나에게도 깊은 경종이 되는 것 같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예복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잔치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데(38-39절)"
오늘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있을까?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봄과 높은 존중/존경을 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한 자리에 서기를 좋아하는가.
사람들의 마음이 높아지고 오만해지다 보면.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경히 여기는 죄를 짓게 되는데.
오늘 나는. 사람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마음다해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함부로 대하며.
그들의 마음을 다치게 하고. 그들의 인격을 상하게 하는가?
주께서 바라는 것은. 종교적 외식과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랑과 자비와 인애이니.
오늘 나의 삶이. 그분의 성품을 닮고.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는.
그런 하루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평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나의 삶과 사역이.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거짓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하나님 앞에서. 또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 앞에서.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그런 나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안주해서는 안 된다.
나 스스로. 오만한 자리에 앉는. 그런 우를 범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겸손히 깨닫고. 겸손히 돌이키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내가 미천한 자요. 먼지와 같은 자임"'을 고백하고. 또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 나의 삶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자임을 자각하는 것이 필요하며.
주께서. 당신의 사랑으로/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시고 받아주셨던 것처럼.
그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를 헤아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오늘 내가.
"내가 누군데"의 삶에 머무르지 않고.
"내가 무엇이관대"의 삶에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이와 같은 은혜. 이와 같은 자비가 흘러넘치길 기도한다.
그리고. 이 찬양의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길 원한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 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 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는.
그런 하루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이 없고 진실한.
그런 우리의 삶 되고. 그런 주의 자녀/백성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그와 같은 자비. 그와 같은 은혜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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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35-37
우리가 믿는 주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계신 분이시다.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며.
한번도 당신의 일하심을. 멈추시거나 포기한 적이 없으셨고.
오늘도 우리를 위해. 일하시고. 당신의 구원 계획을 펼치시고 계신다.
그러니. 그런 주님을. 우리가 어찌 인간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는 인간의 생각과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는 분이시며.
우리의 경험과 우리의 판단으로는.
그분을 헤아릴 수도 없고. 그분을 만질 수도 없는 분이시다.
주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지만.
그는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영원히 쇠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자신. 그분의 본체인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구약에 예견된 메시아(기름 부음 받은 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태어나는데.
그가 어떻게 하나님일 수 있겠냐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그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시며.
다윗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그들에게 전성기를 열어줬던 것처럼.
그도 우리에게. 그와 같은 일을 행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그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는.
다윗의 아류. 다윗 2세에 불과하였다.
우리가 아무리 높은 기준과 상상을 한다 하더라도.
다윗 왕국 이상으로는. 아무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주님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이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임금/다윗의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 주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오신 것이지.
그것이 우리 주님의 본분/정체성은 아니라고 말씀하신다.
오히려 우리 주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영원히 계신 하나님이시며.
다윗은 그리스도를 향해.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닫고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케 하는. 참담케 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 구약에 예언된. 그 메시아. 그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킨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신성모독죄를 적용하고 싶었고.
그렇게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을 뿐이었다.
그들이 보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긴 들어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얼마나 안타까운 현실인가…
하지만 그 구원의 문이. 지금 우리에겐 열려 있다.
주께서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고 계시며.
성령께서. 당신의 친밀한 음성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를 돌이키게 하신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한 것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이시고.
그들이 자신의 목숨과 생명을 건. 담보자/증인으로 섰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되었다.
요한복음에.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 20:29)"고 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도. 하나님 안에서. 그와 같은 복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아침 주님 앞에 나아가며.
감사와 찬양의 고백을 드릴 따름이다.
우리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해 주신단 말인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사랑 덕분이며.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주께 나아가게 되었고.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그분의 백성이 되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은. 우리의 힘이나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 그분의 은혜 덕분이다.
"우리가 보지 못하였으나. 그를 사랑하고.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았기(벧전 1:8-9)" 때문이며.
주께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당신의 사랑을 멈추지 않으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니.
우리가 주님 앞에 감사하고. 그분을 찬양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노래하기 원한다.
"이 땅 위에 오신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이.
오늘 우리의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해. 중심을 다해 고백하는 말이.
"예수는 그리스도시며. 예수는 주라"는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절하고.
주를 주로 고백하는. 그런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영광 중에 오실 주를 기다리며.
주를 선포하고. 주를 증거하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의 평생 가운데.
주께서 그와 같은 은혜. 그와 같은 사랑 베풀어 주시길 간절히 사모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이 땅 위에 오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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