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2:18-27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만약 부활이 있다면. 부활 이후의 삶이. 엉망진창으로 꼬일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형사수취제도"를 그 근거 구절로 둔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하여. 대를 잇고. 자식을 낳아주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만약 그렇게 하면. 아내가 부활한 다음에. 그의 남편은 누구냐?"는 것이다.
그래서 사두개파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황을 설정해서(20-23절).
말도 안되는 질문을 늘어놓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내는. 누구를 남편으로 맞이해야 하는지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요지는 이런 것이다.
"이건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맞지 않는 것이고.
모세의 율법은. 현실과 이상이 다른. 이율배반적인/모순적인 말이기 때문에.
부활은 없고. 부활은 아예 말조차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이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들 가운데 살아날 때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은 상태인데.
어찌 이 땅의 일로. 하늘의 일을 논할 수 있느냐?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시니.
너희가 생각을 잘못해도. 아주 크게 잘못 하고 있다"
주님은. 사두개파 사람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한계와 무능을. 사람들 앞에서. 만천하에 공개하게 되신 것이다.
그러니 이 일이 얼마나 우스운가.
사두개파 사람들은.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자랑"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 앞에 왔는데…
한방에 깨지고. 만 천하 앞에. "자신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드러나게 됐으니.
이 얼마나 X 팔리고. 창피한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우리 주님을 찾아왔다가.
집으로 돌아갈 때는. 한바탕 크게 깨지고 난 다음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빈털털이로.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말씀을 보는데.
"인간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지. 다시 한번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 이 땅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인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고.
오늘 우리의 생각과 지혜로. 하나님을 생각/평가/제단하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고. 또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생각과 태도로 주님을 맞이하고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능력과 지혜를 자랑하는.
오만방자한 태도로 주님을 맞이하고 있을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한탄하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주님의 지혜를 자랑하고 있을까?
나이가 들어가고. 성경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며.
인생에 대한. 나름의 관점과 경험이 더해지면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만의 성/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게 되는데.
이것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닷가에 있는. 모래 한 줌과 같은 것이며.
저 바다에 있는 물을. 작은 컵 하나에 뜬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부분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할 뿐이다.
근데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속을.
마치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하다니…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시도/노력"과 같은 것이며.
모든 사람이. "내 말을 듣고. 내 말을 따라야 한다"는.
무소불위의 자리에 서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하나님 위에 서려는 행동이며.
그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며. 매우 싫어하시는 활동이다.
잠언 6장 16-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실어하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잠 6:16-19)"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시작이.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지혜를 함부로 자랑하다가는.
하나님 앞에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쭈구리가 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가 겸손하고. 낮은 자리에 서기를 원하신다.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 데까지. 나아가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잠잠하기를. 우리 주님은 원하신다.
마치 내가 신이 된 것처럼.
세상 모든 지식에 통달한 것처럼 행동하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는 피조물이요. 하나님의 지음 받은 자임을.
다시 한번 깨닫고. 다시 한번 기억하기를 우리 주님은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 앞에 서길 원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생각과 지식으로. 과연 얼마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 우리의 생각과 지혜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 알고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생각과 지혜가. 얼마나 좁고. 무식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욕하는 길이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길이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자랑하고. 우리 자신을 나타내는 길이며.
그것은 주께서. 흔드시고. 없애버릴 것이다.
마치. 사람들이. 하늘에 닿고자 하여 바벨탑을 쌓다가.
주께서 흔드시고. 그것을 없애버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당신의 자비와 겸손함을 배우는.
그런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지혜와 능력을 가르쳐 주시는. 그런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주님 말씀 앞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끊임없이 자라가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의 지혜와 그분의 뜻을 배우며.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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