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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1-14
오늘 본문을 보면.
"불의한 재판장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아주 꼴통 재판관인데.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참 웃긴 말이지 않은가.
보통 사람들은 자기를 미화하고. 자기를 칭찬하기 마련인데…
자기 자신을 향해서.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한다"고 말할 수 있다니…
그런 측면에서 이 사람은. <꼴통>이 분명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처럼.
이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과 직분을.
자기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만 사용했으며.
공정한 재판과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데 있어서는.
아무런 관심도. 아무런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냥 사람들이 굶어 죽으면 그만이지.
그게 내 인생과 무슨 소용이 있냐며.
손을 놓고. 자기 밥그릇 챙기는데만 관심을 갖는.
그런 꼴통. 그런 철부지 재판관이었던 것이다.
근데 본문을 보면. 그 재판관에게 가서.
끊임없이 상소를 놓고. 하소연하는 사람이 나온다.
이 사람은. 그 도시에 살던 한 과부였는데.
그에게는 어떤 억울한 일. 원망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밤낮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재판장에게 가서. 투서를 집어넣는데.
이 얘기를 듣고. 재판장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도 무시하나.
이 과부가 계속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 수가 없구나.
왜냐하면… 만약 내가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이 사람이 끊임없이 내게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니.
내가 어찌 그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래서 주님이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우리 주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같지 아니하니.
너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끊임없이/속히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오늘 본문 8절에 나오는 말씀이. 우리의 가슴/심장을 파고 드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 말은. 우리 주님이. "내가 속히 너의 기도를 듣고. 내가 속히 너의 원한을 풀어주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이 땅 가운데. 과부처럼. 과연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겠지만.
오늘 너희 가운데. 정말 기도하고 엎드릴 자가. 얼마나 있냐?"며.
한탄하고 슬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이 말씀은.
우리의 심장/폐부를 푹 찔러 쪼개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면서.
<기도의 중요성>과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는. "기도를 왜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으며.
"기도를 어떻게/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좀처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도하는 것보다. 말로/행동으로 앞서는 것이. 더 쉬운 우리이며.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보다.
탄식하며. 하나님 앞에 절망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우리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가 말하기르.
"왕 앞에서 급히 물러가지 말라(전 8:3)"고 하였지만.
우리는 문을 닫고. 예배당을 나서는 것이 훨씬 더 쉬운 사람들이며.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죄를 짓고. 범죄하기 쉬운 것이 오늘 우리 인생들인데…
주님은 그런 우리의 습성을 아시고. 이와 같이 탄식/안타까워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로 기도하겠다"는 숱한 다짐과 맹세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그런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누가 날 위해 가서 저들을 구원케 할꼬"라는 하나님의 질문 앞에.
이사야 선지자가 "주여 나를 보내소서"라고 답하였던 것처럼.
"오늘날 이 시대 가운데. 내가 과연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고 주님 질문하실 때.
"주님! 내가 바로 그런 사람되기 원하며. 주님! 내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진실한 공동체. 그런 진실한 믿음의 친구들 되기 소원한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잠 25:13)"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참된 안식과 기쁨. 나 누리겠네.
경배하며 주의 얼굴 구할 때.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나의 주 하나님은 신실하신 주님.
기도 들으시는 하나님. 폭풍 속의 내 등불. 내 노래시라.
주의 날개 아래서 내 맘 쉬리니.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나의 주 하나님은 신실하신 주님.
평화 내려주신 하나님. 나로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게 하소서.
나의 평생에 주의 사랑을 전하리. 신실하신 주님 찬양해.
신실하신 하나님. 신실하신 주. 나의 주 하나님은 신실하신 주님"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길 소원하며.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죄와 악으로 물든 이 세상 가운데서.
낙심하지 아니하고. 주님 앞에 끊임없이 기도하며.
주님 앞에 끊임없이 간구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주님 보좌 앞에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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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20-37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끓는 물 안에 개구리가 들어가면. 깜짝 놀라 뛰쳐 나오지만.
차가운 물 속에 개구리를 집어 넣고. 그 물을 점점 더 뜨겁게 하면.
개구리는 위험한 줄 모르고 죽게 된다."
물론 이 말이 사실은 아니다.
현대 생물학자들의 실험에 의하면.
점차 데워지는 물 속에서 뛰쳐나가는 개구리도 있었고.
어떤 개구리는. 이런 변화 속에서도 그냥 가만히 있다가 죽는 개구리도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그냥 개구리 마음'이라 보는 것이.
어쩌면 더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얘기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우리가 고심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상심을 주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이분들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열정적으로 목회를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 둘 현실에 타협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순간. 변질되고 타락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치권의 유력 인사들도 그렇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할 때만 하더라도.
그렇게 정의의 편에 서서. 민족 투사를 자청하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 세력이 되고.
젊었을 때 자기가 하던 말과. 반하는 말을 할 때도 더러 있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원래 처음부터 그랬던 걸까. 아니면 어느 순간 변질된 것일까?
아마도 어느 순간 변질됐을 가능성이 크다.
'근묵자흑'이라고.
좋지 못한 사람들과 가까이 하다 보면. 어느새 악에 물들게 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일진대.
그들도 어느 순간. 현실에 타협하고. 거기 물들어갔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이처럼 오늘 우리 곁에는.
아무런 생각도 아니 하고.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아니하다가.
자연적으로 도태하고. 자연적으로 세속에 물들어 가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늘 깨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게 아닐까 싶다.
만약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우리도 어느샌가.
현실에 물들에. 현실에 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그렇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보면. "종말의 때"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는데.
그 날의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그러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롯의 때에도.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다가.
결국 하늘에서 오는 심판을 맞게 되었으니…"
이것은 오늘 우리 인생 또한. 그와 같을 거라는 것이다.
만약 오늘 우리 인생이. 환란을 겪고 어려움을 겪는다면.
우리는 지금에라도 당장.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게 되겠지만.
만약 오늘 우리 인생 가운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풍요로운 일들만 있다면.
우리는 어느샌가 세속에 물들고. 자연스레 하나님을 떠나기 쉽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왜냐하면. 그날은 "도적같이" 임하기 때문이다.
도둑이 언제… "내가 언제 몇 날 몇 시에 당신 집에 쳐들어 가겠습니다"라고 선전포고 쳐들어 오는가.
도둑은 그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던 때에"
그때 우리를 찾아올 것이기에.
우리가 깨어서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근신하며 살아갈 때.
우리가 구원을 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깨어 살아가는. 그런 복된 하루 되었으면 좋겠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하였는데…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시체처럼/주검처럼 살아가는.
그런 하루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영적인 생명력과 복음으로 풍성한.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 인생이. 겨자씨 나무처럼.
새들이 깃들고. 생명이 풍성한.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나음을 입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이곳에 생명샘 솟아나. 눈물골짝 지나갈 때에.
머잖아 열매 맺히고. 웃음 소리 넘쳐나리라.
그날에 하늘이 열리고 모든 이가 보게 되리라.
마침내 꽃들이 피고. 영광의 주가 오시리라.
꽃들도 구름도 바람도 넓은 바람도.
찬양하라. 찬양하라. 예수를.
하늘을 울리며 노래해 나의 영혼아.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은혜의 주"
오늘 하루 우리 인생 가운데.
주님의 꽃이 피고. 주님의 향기가 나며.
주님의 열매가 맺히고. 주님의 생명이 전파되는.
그런 복된 하루. 그런 복된 우리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꽃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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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19
오늘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다.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러 와서.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말하는데.
이에 예수님.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제 곧 너희 병이 나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그들의 병이 진짜 낫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에 아홉 사람은 제사장에게 가고.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게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표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며.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으면. 감사를 고백해야 하는데.
왜 한 사람만 주께 감사를 돌리고.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는가.
더욱이 그 한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무시하던 사마리아 사람들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가고. 이 사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 <감사>에 포커스를 맞추는데.
오늘은 말씀을 보다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감사>가 아닌. <누가 진짜 제사장인가>에 대한 것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9명의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충실히 생활할 뿐이었다.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으니.
그 말씀에 따라 충실히 행동했을 뿐이며.
모세의 율법에 의해서도. 그들의 행동은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었다.
왜냐하면. 나병환자가 자신의 신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제사장의 확인과. '병이 나았다'는 선언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서. 자신의 몸을 보이고.
"병 나음" 선언을 받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마리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제사장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하셨는데.
진짜 제사장은 누구일까?
모세의 율법과 사람의 전통을 따라 세워진 제사장들인가.
아니면. 우리의 몸을 깨끗케 하고 정결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인가?"
아마 사마리아인의 마음 속에는 이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라"고 했을 때.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 속에는. 혁신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의 참된 제사장은. 인간의 법을 따라 세워진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바로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참된 주의 제사장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 나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며. 감사를 표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주님이 더 큰 선언을 해 주신다.
그것은 그의. 육신의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을 받고.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이다(19절).
인간 제사장으로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우리 주님이. 선언해주시고. 말씀해 주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 예배 드리는. 그런 복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의 참된 제사장은 누구인가.
오늘 우리가 예배하고. 경배할 분은 누구인가.
그것은 오직 우리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시다.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없으며.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우리가 예배하고. 우리가 엎드릴 분도 없으시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시요. 생명이 되시나니.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께 찬양을 돌리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보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그런 복된 하루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담아.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서길 원한다.
"영광을 돌리세. 우리 하나님께.
존귀과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
만방의 모든 신은 헛된 우상이니.
오직 하늘의 하나님. 그 영광 찬양해.
주님의 영광. 모든 나라 위에.
주님의 영광. 온 세계 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영광 찬양해.
우리 주님 뜻은 이뤄지리라. 우리 주님 나라 영원하리라"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분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그런 복된 하루. 그런 복된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이 시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다.
(feat. 영광을 돌리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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