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6:14-31
어제 우리는.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살펴보았다.
그 당시 이스라엘 안에는. 불의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유익을 위해 살아갔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이 땅의 풍조와 불의한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나 마음의 불편함이 없었고.
오히려 예수님의 얘기를 듣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기 일쑤였다.
오늘 본문이 그 사실을 대변한다.
실제로 오늘 본문 14절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을 마치신 다음.
"바리새인들이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이라고 말하는데.
이 얘기는. 예수님의 말씀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니가 뭔데.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 앞에. 한 가지 심각한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말씀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 19절에 나오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은.
그당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자비/긍휼을 잊어버리고.
자기 배를 채우고. 자기 목만 축이는데 열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9절을 보면.
"부자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살고 있었는데.
자기 눈 앞에 있는 이웃의 고통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이나 거리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개보다 못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부자의 집 앞에 버려진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였다"라고 하는데…
여기 나오는 '부스러기'란.
단순히 빵을 먹다가 떨어지는. 작은 부스러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당시. 음식물 찌꺼기를 닦아내고 낸 다음에…
그 다음에. 바닥에 버린. 빵 부스러기를 뜻하는 것인데…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그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처사이다.
"아니. 어떻게 사람에게 음식물 찌꺼기를 줄 수 있단 말인가"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삭을 다 줍지 말고. 그를 위해 남겨두라고 말하는데.
어쩜 이렇게 자비도 없고. 은혜도 없는지 모르겠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일까.
이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 자부할 수 있는 행동일까.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여전히 '하하호호. 깔깔대며' 오늘을 살아갔다.
하나님 앞에 주어진. 자신들의 임박한 심판도 알지 못한채 말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주께서 그들을. 음부의 심판 가운데 내버려 두시는데…
그들은 그제서야 하나님 앞에 자비를 구하고. 은혜를 구할 따름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24절을 보면…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라고 하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아직도 나사로를. 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 뭔데. "나사로를 보내서. 자기 목을 축이게 해달라"고 말하는 건가.
자기가 뭔데. "나사로를 보내서. 물을 가져 오라"고 말하는 건가.
그는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으며.
그는 여전히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 오만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끝까지/죽을 때까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데...
이것이 오늘 이땅을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자기 밖에 모르고.
선을 행할 줄 모르며.
자기에게 닥친 일들만. 제일 위급한 일/제일 위중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끊임없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삶을 사는 자.
그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만약에... 죽은 자들이 그들에게 가서...
"너희가 이렇게 살다간 큰 일 난다"고 말해준다면.
그러면 그들이 들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우리 주님은 결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이미 주께서 수차례/끊임없이/거듭 말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기" 때문이며.
지금 당장.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기 보다.
내 눈 앞에 있는 즐거움과 유익이 훨씬 더 크기 때문에.
그래서 주의 말씀을 무시하고.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31절)"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의 삶을.
하나님 앞에 깊이 돌아보기 원한다.
오늘 우리는 주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업긴여기며. 비아냥거리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말씀 앞에. 자기 자신을 엎드리며. 낮추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전도서 5장 1절을 보면.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그를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종교적 외식과 종교적 행위로 만족하며.
하나님을 업긴여기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태도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청종하며.
오늘 우리의 인생을 돌이키며. 오늘 우리의 뜻을 돌이키는.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인가?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마음을 완악하게 함으로. 범죄하고 주와 멀어지는.
그런 우리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직 주의 음성을 듣고. 주께 돌이키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가가.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사 55:6-7)"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복을 얻고. 하나님 안에서 평화를 누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또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고.
주님의 그 놀라우심은. 다 표현할 수가 없네.
누가 그 지혜를 깨닫고. 누가 깊은 사랑 측량할까.
보좌에 앉으신 주의 위엄. 아름다우신 주님.
내가 주를 경외함으로. 주님 앞에 홀로섭니다.
찬양 받으시기 합당한. 거룩하신 주님.
And I stand in awe of you.
I stand in awe of you.
Holy God, to whom all praise is due.
I stand in awe of you.
And I stand in awe of you.
I stand in awe of you.
Holy God, to whom all praise is due.
I stand in awe of you"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서며. 하나님 앞에 홀로 엎드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나아가길 원한다.
(feat. 주의 아름다움은 말로 다)
'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 > 누가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03.30(주일) 눅 17:11-19 (0) | 2025.03.30 |
---|---|
2025.03.29(토) 눅 17:1-10 (0) | 2025.03.29 |
2025.03.27(목) 눅 16:1-13 (0) | 2025.03.26 |
2025.03.26(수) 눅 15:11-32 (0) | 2025.03.25 |
2025.03.25(화) 눅 15:1-10 (0) | 2025.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