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_시냇가에 심은 나무/나훔'에 해당되는 글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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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7 :: 2020.08.27(목) 나 2:1-13
나 3:8-19
'테베'는. 고대 이집트의 유명한 도시였다.
천하의 요새였으며. 든든한 우방의 도움도 있었다.
그들은 영원히 승승장구 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부족할 것도. 급할 것도. 꿀릴 것도 하나 없었다.
하지만. 역사가 말해준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이다.
결국 그들은 멸망했으며. 모든 사람이 길거리로 나뒹굴게 되었다.
앗수르/니느웨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신흥강국답게. 더 교만하고. 더욱 패기가 넘쳤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주변 나라들은. 자신의 부하/속국/따까리였으며.
지기 힘/손으로. 언제든지/무엇이든지.
'쪼물딱 쪼물딱'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니까. 너희도 마찬가지야!!"
오늘 말씀이 이것을 예언한다.
너희는 익은 무화과 나무처럼 떨어지게 될 것이며(12절).
너희 성문은 불 타 없어질 것이며(13절).
너희 백성은 여기저기 흩어질 것이다(18절).
결국. 그들은 회복불가 상태에 접어들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그들의 힘은. 쇠락하였고.
꼬붕으로 생각했던 주변 나라들도. 그들을 배신하였다.
도리어 그들은. 앗수르/니느웨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꼬시다. 쌤통이다. 카~악! 퉷!!!"
그렇게 그들은. 니느웨가 망한 것을 보고. 기뻐 손뼉친다.
그리고. 사람들을 불러다가. 이 소식을 전한다.
더 많은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말씀을 보는데. 마음이 무겁다.
고대 이집트 제국의 테베의 모습이.
고대 앗수르 제국의 니느웨의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정치적 신념으로. 똘똘 뭉쳐있는. 극우 기독교의 모습이. 한탄스럽다.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대체 무엇일까?
그들은 어찌하여. 사람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놓고.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으로 끌고 가는가...
세상에 생명을 주고. 소망을 주어야 할 교회가.
어찌하여. 사람들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하는가...
목사로서. 또 같은 기독교인으로서. 정말 눈물이 앞을 가릴 따름이다.ㅠ
아무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교계의 모습에. 더욱 마음이 아프다.
왜 교계의 지도자/원로들은. 그들을 향해서. 아무도 꾸짖지 않는가?
왜 우리는. 그들의 험악하고. 무식한 말을 그대로 듣고 있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렇게 무력하고.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어야만 하는가?
억울하고. 비통하고. 치가 떨린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 나라란 말인가?
이것이 정말. 거룩한 도성. 하나님의 나라란 말인가...
그렇기에. 이 말씀이. 더욱 가슴을 찌르고.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네 소식을 듣는 이마다. 네가 망한 것을 보고. 기뻐서 손뼉 치노라
너의 계속되는 학대를 받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나 3:19)"
그런 측면에서. 지금 우리는. 재를 뒤집어 쓰고. 기도하여야 한다.
세례 요한이. 사람들을 책망하고 꾸짖었던 것처럼.
우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는 맹목적인 믿음/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기 위해서' 꼼수를 부려서도 안 된다(마 3:7-9).
지금은 우리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며.
하나님께. 또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 때다.
그리고. 주님께 매를 맞고. 우리의 독을 빼고.
우리의 곪은/썪은 부분을 도려내고.
우리의 상처를 다시 싸매시고. 회복하시는 주님의 자비/은혜를 바랄 때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무겁고 비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릴 따름이다.
옥한흠 목사님이. 한국 교회를 망하게 한 것은. '바로 나'라고 하였던 것처럼.
내로 내가. 오늘 한국 교회를 망하게 하였다고...
내가 거기에 일조하고. 침묵하고. 동조하였다고...
회개하며. 자복하며. 주님 앞에. 눈물로 무릎을 꿇는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오늘 우리는. 정녕 주님의 백성인가...
바라기는. 주께서 이 땅을 고쳐주시길.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고쳐주시며.
우리 조국 교회를 고쳐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이 아침. 눈물로 주님 앞에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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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3:1-7
어제 말씀에서. 우리는.
니느웨의 근원적인 잘못이. 그들의 지독한 '자기 중심성'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들은. 내 배 부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았으며.
내 처자식 눈에 웃음꽃 피게 하려고. 다른 사람 눈에 피눈물 나게 하였다.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엄히 심판하셨다.
그들의 교만과 완악함을. 가만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 니느웨에 대한 심판이 이어지는데.
나훔 선지자는. 니느웨의 잘못을 다음과 같이. 추가 고발한다.
"피의 도성. 거짓말과 강포가 가득하며. 노략질을 그치지 않는 도성(나 3:1)"
"창녀가 되어서 음행을 일삼으며. 마술을 써서 사람을 홀리는 도성(나 3:4)"
한마디로 얘기해서.
니느웨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폭력과 억압을 일삼으며.
성적으로. 도덕적으로. 음란하고. 패역하였으며.
수많은 우상과 이방신들을 섬기며.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던.
'어둠의 도시'였던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니느웨'의 어둠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을까?
그들의 불의와 부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을까?
그들의 탐욕과 탐식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탄식하며 좌절했을까?
이 땅에 스며든. 사람들의 눈물과 피의 양이 얼마나 많았을지.
생각해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다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동생을 죽이고. 하나님을 향해. 핏대를 세우고. 대들던 가인.
그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의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네가 그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는다(창 4:9-10)"
가인은. 아무도 몰래. 완전범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잘못을. 하늘이 보고. 땅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소리치고. 땅이 울부짖는다.
"하나님께서. 억울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갚아달라"고.
탄식하며. 절규하는 것이다.
그런데. 창세기에 나오는 이 말씀과. 오늘 나훔서의 말씀이 오버랩된다.
"내 백성이 어디 있느냐. 네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하였느냐.
내 백성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
내 백성의 탄식 소리가. 하늘을 떠돌아 다닌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니느웨의 잘못을 엄중히 심판하시며. 그들에게 책임을 물으신다.
"이제 내가 너를 치겠다. 너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며.
하나님이 분명하게.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이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아...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듯이. 하늘이 듣고. 땅이 듣는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증인이구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땅의 나무도.
심지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공기 조차도.
우리를 주목하며. 우리를 살피고 있구나.
이곳은 정말. 하나님의 도성. 거룩한 하나님의 전이구나"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더욱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며. 모든 것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지난 날을 돌아볼 때. 나는 어떤 생각/자의식을 가지고 살았을까?
나는. 오늘을 살아가며. 어떤 임재 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삶을 주목하고 계시며.
우리 주님은.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주님의 백성답게. 아름답고 기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오늘 하루. 우리가 그 주님의 기쁨이 되길 소망한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이 우리를 고소/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우리를 높이고 찬양하는 그런 하루 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다.
feat_1.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하네
feat_2.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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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2:1-13
'나훔'서를 잘 보지 않기에.
그 내용이나. 문학적 표현을 크게 주목한 적은 없었다.
근데. 오늘 본문을 읽어보니. 나훔 선지자의 글빨/말빨(?)이 장난 아니다.
어쩜 이렇게. 생생하고. 실감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오늘 본문 처음부터 그렇다.
'적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니느웨는. 애를 써서. 이것을 막아본다.
하지만. 나훔 선지자가 이렇게 말한다.
"성을 지켜보려무나. 길을 지켜 보려무나.
허리를 질끈 동이고. 있는 힘을 다하여 막아 보려무나. 니가 별 수 있나.(1절)"
조롱의 말이다. 그들이 그렇게 애를 쓰고. 용을 써봐야 별 수 없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끝난 게임이니까...
그렇기에. 나훔 선지자는.
그날의 모습을. 세세히 그림 언어로 설명한다.
전쟁에 관한 기록뿐만 아니라.
니느웨 성 사람들이 비탄에 빠져 있는 모습까지(3-10절).
마치. 내가 진짜 그곳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리고. 11절부터 13절까지. 니느웨 성에 대한. 총평/비평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이 말씀이. 나에게 '턱'하니 부딪혀 온다.
왜냐하면. 니느웨의 잘못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내 안에. 또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문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수사자가. 새끼에게 먹이를 '넉넉히' 먹이려고. '숱하게' 죽이더니.
수사자가. 암컷에게도 '많이' 먹이려고. '많이도' 죽이더니.
사냥하여 온 것으로. 바위 굴을 '가득' 채우고.
잡아온 먹이로. 사자굴을 '가득' 채우더니(12절)"
생각해 보면. 이게 뭐가 잘못 되었을까 싶다.
어쩌면. 니느웨의 모습은. 힘있는 아버지. 용감한 아버지.
능력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으니까.
내 새끼. 내 가족. 내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내가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한 것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인가.
니느웨는. '자기애'와 '가족애'로 똘똘 뭉쳐 있었고.
그는. 가족들 앞에선. 더할 나위 없는. Best. 최고의 아빠였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이건 아니었다.
"야! 니 새끼만 소중하고. 남의 새끼는 소중하지도 않냐.
니 새끼만 사람 새끼고. 다른 사람 새끼는 사람 새끼도 아니냐.
니들만 그렇게 잘 먹고 잘 살면 되냐.
니가 잘 먹고 잘 살려고. 다른 사람 눈에 그렇게 피눈물 흘리게 해서 되냐!"
하나님은. 결국. 자기 밖에 모르는 니느웨 사람들을 향해. 심판의 칼을 건냈다.
그리고 그들은. 연기와 함께 이땅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무엇때문에?
자기들밖에 모르는. 그들의 이기심 때문에.
자기 새끼 소중한 줄 알면서. 남의 새끼 소중한 줄 모르는. 그들의 무지 때문에.
적당히 먹지 않고. '더 많이', '더 많은 것'을 채우고 가지려는.
그들의 탐욕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마음이. 내 안에 또 우리 안에 있다.
실제로. 오늘 우리는. 내 새끼/내가족/내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간다.
훌륭한 모습이다. 책임 있는 어른의 모습이며. 아주 멋있는 모습이다.
그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칭찬 받고, 각광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선 안 된다.
내 새끼 소중하듯. 다른 새끼도 소중하고.
내 가족 중요하듯. 다른 가족도 중요하고.
우리 공동체가 중요하듯. 다른 공동체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시간이 흘러갈수록.
'역지사지'의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자기 중심주의, 지역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죽고 살기' 위해. Zero sum 게임. 치킨 게임을 할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고.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환경/생태계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자기 살 길에 바쁘고.
내 새끼. 내 가족. 내 공동체. 내꺼. 내꺼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장 같다.
"수사자가 새끼에게 먹이를 넉넉히 먹이려고. 숱하게 죽이더니.
너도 그러느냐.
사랑하는 자녀를 향한. 네 마음/애정은 알겠다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더냐..."
바라기는...
자기밖에 모르는. 우리의 이기심과 탐욕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자족하며. 감사하고.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한다.
인간의 번영과 풍요로움을 위해.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을. 아름답게 돌보고 가꾸는 청지기가 되길 기도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길. 그것이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길이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평화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간다(사 11:1-9).
(feat.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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