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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3.04 :: 2025.03.05(수) 눅 9:1-17
눅 9:1-17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에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힘과 능력을 부어주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주께서 그들을 보내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천국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오늘 본문 1절과 2절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1-2절)"라고 얘기하는데.
그 결과 제자들이 나가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며. 수많은 사람의 병을 고쳤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 일이 얼마나 신비하고. 놀라웠던지.
헤롯도 그 소식을 듣게 되었고. 두려워 떨며. 심히 당황하였다고 말한다.
이것은 도저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신적 권세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내가 분명 요한의 목을 베었거늘. 어떻게 이런 일이 내 귀에 들리냐며.
내가 그를 직접 보고. 내가 그를 직접 마주하고 싶다"고 말하는데.
그만큼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사역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8절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향해서.
어떤 사람은. "엘리야가 나타났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그를 가리켜.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가리켜. "옛 선지자 가운데 한 명이. 우리 가운데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데...
수많은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예수를 따르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무리가 (예수와 그의 공동체 소식을 듣고) 알고 그를 따라왔으며"
그들은 해가 저물고. 밤이 가까워 오는데도.
집에 돌아갈 생각도 않고. 계속 예수님 곁에 머물러 있는다.
이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일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 같아서.
불쌍하고 긍휼해서. 그래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하지만(막 6:34)
그것이 제자들의 생각에. 납득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우리에겐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밖에 없으니.
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먹을 것을 사지 아니하고서는. 할 수 없사옵나이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쉽게 말해서. 불가능하고. 가당치도 않은 일이라 항변하는 것이다.
충분히 납득 가능한 말이다.
제자들이 도대체 무슨 수로. '5천 인분'의 식사를 하루 아침에 준비할 수 있단 말인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도대체 무슨 수로 5천 명의 사람을 먹일 수 있단 말인가.
제자들 입장에서는. 충분히 화를 내고.
어처구니 없다고 소리칠 법한 말이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사실 이것만 어처구니 없는 것이 아니라.
앞에 나오는 말도. 똑같이 어처구니 없는 말이다.
주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너희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너희가 귀신 들린 자를 쫓아내라"고 말씀하실 때.
사실 이 말씀도 어처구니 없는 말씀이지 않은가.
제자들이 도대체 무슨 수로 사람들을 고치고.
제자들이 도대체 무슨 수로 귀신을 내쫓아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며. 하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다.
근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믿고. 그 길을 떠나갔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병 고치는 은사"와 "능력" 주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하지는 않으시지만.
주께서 우리 가운데. 당신의 능력과 당신의 은혜 베풀어 주셨음을.
제자들이 믿고. 제자들이 신뢰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도.
자기에게 주어진 사역을. 믿음으로/담대히 행할 수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이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 않은가.
분명 주께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똑같이 명하셨는데.
앞에서는 예수의 이름을 믿고. 예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행하더니.
지금은 예수님이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냐고. 항변하고 따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측면에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은. 영적인 일이라서.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었고.
사람들을 먹이고. 그를 배불리 채우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여서.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측면에선.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마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근데. 오늘 내가 말씀을 보면서. 생각이 든 것은.
어쩌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음으로.
그의 믿음이 뒤로 퇴보하고. 그의 믿음이 뒤로 물러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어린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어린 아이가 길에서 넘어질 때가 있는데.
그때 어린 아이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게 되면.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씩씩하게 손을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 곁에.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있고. 부모가 있으면.
그때부터 응석을 부리고.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작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세상 떠나갈 정도로 울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손에 피 한방울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이라도 당장 죽을 것처럼.
목놓아 울고. 소리쳐 울기도 한다.
왜 그럴까?
인간은 자기를 받아주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뒤로 퇴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이긴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먹이고. 우리가 어떻게 이 사람들을 돌볼 수 있냐?"고 항변하고 있는데…
만약 이들의 믿음이. 바른 믿음으로 귀결되려면.
그들은 예수님 앞에 구하고. 도움을 간구했어야 했다.
"주님. 주께서 우리 가운데. 귀신을 고치고. 병고치는 은사를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가운데. 이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주님 우리 힘으로는 이것을 능히 감당할 수 없지만.
주께서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고. 명령을 내리시면.
우리가 능히/충분히 이 일을 할 수 있사오니.
주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주님 우리에게 명령하여 주시옵소서"
하지만 제자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주님께 도움을 구하지도 않았고.
주님께 지혜를 구하지도 않았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어떤 목적으로/어떤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묻고.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사람도 하나 없었으며.
내가 무엇을 하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주님께 묻고 주님께 간구하는 사람도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그들의 믿음은.
뒤로 물러서고. 퇴보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 곁에 예수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 때문에.
그들의 믿음이 죽고. 그들의 믿음이 바로서지 않은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
제자들 곁에 40일 동안 머무르다가 하늘로 올라가시는데.
이것은 '내가 떠남으로' 인해서.
그들의 믿음이 더욱 견고히 서고. 그들의 믿음이 더욱 굳건히 자리 잡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내가 있을 때는. 이들의 믿음이.
계속 어린 아이처럼. 유아기 신앙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데.
내가 떠남으로 인해. 이들의 믿음이.
스스로 독립하고.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음을.
우리 주님이 알고. 그들을 하나님 손에 의탁하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자라가고 있는지.
함께 되물어 보는 것 같다.
주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엎드리다가.
주님이 눈에 보이고.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는.
어린 아이처럼 응석을 부리고. 엄살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 아이처럼 계속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깊어지고. 스스로 독립해 갈 있는.
성숙한 어른.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가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신다(고전 10:13)"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시험과 여러 환란 앞에서.
주께서 우리 가운데 감당할 만한 힘과 지혜를 주시고. 능력 주시기를 간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오늘 우리 가운데 주님이 원하시는 성숙한 믿음이며.
그것이 오늘 우리 가운데. 주께서 바라시는.
성숙한 신앙/성숙한 성도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서. 성숙한 길로 나아가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주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주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듣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즐겨부르는 찬양의 가사처럼.
"내가 겪는 시험이 어렵고 힘겨워도. 내 주님보다 크지 않다"고 고백하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내 앞의 바다가 갈라지지 않으면. 주께서 나로 바다 위 걷게 하신다"는.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고. 그런 믿음으로 오늘 하루를 승리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한다.
"주의 능력으로. 내 삶 새롭게 되고.
주의 능력으로 담대히 나아가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주님 앞에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겸손히. 주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내게 허락하신 시련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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