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8:31-43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고.
사람들에게 능욕 당하고. 치욕을 당한 다음.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우리 주님이 3번째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 좋겠건만.
그들은 아직도 영적인 소경과 같아서.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첫번째 수난 예고가 있었을 때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멱살을 붙잡고. 절대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다그치기도 했었고.
두번째 수난 예고가 있었을 때는.
주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히 묻고. 그 뜻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세번째 수난 예고가 있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자기들이 받을 유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눅 18:28).
마가복음 10장에서는. 예수님의 세번째 수난 예고가 있었을 때.
제자들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싸웠다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니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기가 찼겠는가.
자기는 죽을 날이 가까이 와서.
마음이 괴롭고 복잡하고. 심란한 마음으로 가득한데.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의 말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고.
자리 싸움에만 치열하게 열중하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며. 우리 주님은. "정말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이 누구나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경/맹인 바디매오>다.
실제로 오늘 본문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여리고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는데.
그는 예수께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기 시작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면서.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기 시작하는데.
그에게는 사람들의 시선과 체면 따위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기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 주님의 얼굴을 보고.
내가 다시 한번 사람처럼 사는 것이. 자기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이 일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이 자기를 모욕하고 능멸하는 것쯤은.
아무런 문제거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앞서 가던 자들이. 그를 꾸짖어 이르되.
"잠잠하라! 조용히하라!"고 핀잔을 주고 있는데.
그는 더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부르고.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우리 주님이 그를 명하여 데려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는 앞도 뒤도 보지 않고. 우리 주님의 목소리가 있는 쪽으로.
벌떡 일어나 뛰어갔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50절을 보면.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모습이 참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도대체 이 사람은 뭘 보고 뛰어 나갔을까?
앞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뭐가 그리 급해서. 우리 주님께 뛰어 나가고.
그분께 달려가고 있을까?
그러다 넘어져 다치거나. 자칫 자기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는 왜 이렇게 무작정/다급하게 뛰어가고 있을까?"
그것은 바디매오의 마음 가운데 있는.
<간절함과 절실함> 때문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 수 없다는.
간절함과 갈망 때문에.
그래서 예수의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우리 주님을 찾기 시작했으며.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기회와. 삶의 자리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놓치거나. 그분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의 모욕과 능욕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달려가는데…
이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상반되게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께 그 뜻을 묻지 못하고.
자기의 자리를 챙기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누가 더 큰 자인지" 싸우고. 싸움박질만 하고 있을 때에.
바디매오는 예수의 소식을 듣고.
"주여 나를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보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하고 있으니.
이 두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대조적으로 그려지고 있는가.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누가 진짜 맹인인지" 우리에게 다시 물어보는 것 같다.
눈앞에 있는 예수를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는.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맹인인가.
아니면. 육신의 눈은 가리웠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서는. 영적인 눈이 밝아있는.
이 사람/바디매오가 맹인인가?
오늘 우리에게. 많은 재산과 부가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못하고.
악착같이 인색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부자인가.
아니면. 오늘 내 손에 주어진 것이 많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내 소유를 나누고.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서.
내 것을 드리고. 내 것을 허비하는 사람이. 진짜 부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따로 하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너무나 분명하게 잘 알 것이다.
참된 행복은.
더 많은 것을. 더 악착같이. 더 빨리. 더 높은 곳에 이르는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알며.
그리스도와 동행할 때.
그때 비로소 오늘 우리 가운데. 참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기에.
주님은 우리가 그와 같은 삶을 살기 원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참된 행복. 참된 부를 찾아 떠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우리의 눈이 어두워져 있다면.
주께서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고.
오늘 우리의 귀가 가려져 있다면.
주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그래서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께서 우리 앞을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런 반응도 없고. 아무런 감흥도 없는" 그런 삶이 아니라.
바디매오가 우리 주님께.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엎드리고.
우리 주님을 전심으로 따라가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어두운 내 눈 밝히사. 진리를 보게 하소서.
진리의 열쇠 내게 주사. 참빛을 찾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눈을 뜨게 하소서. 성령이여.
막혀진 내 귀 여시사. 주님의 귀한 음성을.
이 귀로 밝히 들을 때에. 내 기쁨 한량없겠네.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귀를 열어 주소서. 성령이여.
봉해진 내 입 여시사. 복음을 널리 전하고.
차가운 내 맘 녹여주사. 사랑을 하게 하소서.
깊으신 뜻을 알고자. 엎드려 기다리오니.
내 입을 열어주소서. 성령이여"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어두운 눈을 밝히시며. 막혀진 귀를 여시며.
봉해진 우리의 입술을 여는.
그런 복된 하루. 그런 복된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어두운 내 눈 밝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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