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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4.03 :: 2025.04.04(금) 눅 19:1-10

눅 19:1-10

오늘 본문을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이 사람의 이름은. <깨끗한. 순결한. 의로운>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
그의 삶은. 그 이름의 뜻과.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실제로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그의 역할/신분을 "세리장"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한 직업으로 여겨졌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세리는. 로마 정부와 긴밀히 소통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등골을 빨아먹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자기 재산을 축적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로마 정부에. 일정한 세금을 상납하고 난 다음에는.
남겨진 것을. 자기의 몫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시/멸시/천대 받기 일쑤였다.

게다가 삭개오는 키도 작지 않았던가.
그 당시 남자들 세계 안에서는. "힘이" 매우 중요한 가치 척도의 수단이었는데.
삭개오의 키도 작고. 힘도 약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놀림감이 되고. 조롱감이 되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


근데 그랬던 삭개오가. 오늘 예수의 소식을 듣고 달리기 시작한다.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그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 기자는. 그런 삭개오의 마음을 표현하며.
"보기 위하여"라는 말을 2번이나 기록한다.
실제로 2절을 보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라고 말하고 있고.
3절에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가.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갔다"고 말한다.

그만큼 삭개오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궁금증과 의문으로 가득하였다.
마치 오늘 본문 앞부분에 나오는. 바디매오의 모습과 같다.
"예수께서 지나신다"는 소식을 듣고.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었는데.
오늘 삭개오도. 하나님 앞에 그와 같은 모습으로 반응하고 있다.

다만 소리를 낼 수 없을 뿐이다.
혹시라도 소리를 냈다가는. 사람들에게 맞아죽을까 싶었고.
그렇기 때문에 삭개오는. 그저 숨죽이고. 멀리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음의 소원과 갈망만 가득 품은채.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하나님 앞에/우리 주님 앞에. 간절히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그 모습을. 우리 주님이 보시고.
삭개오 앞으로 찾아오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이 말을 듣고.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예수님이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다니. 예수님이 내 이름을 어떻게 아시는가"
삭개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속히/급히 돌무화과 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즐거워하며. 기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리고 주님께 이렇게 외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놀라운 선언이지 않은가.
앞에서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볼 때는.
"그가 재물이 많아. 근심하며 우리 주님을 떠나갔다"고 말하는데.
삭개오는. 어떻게. 아무도 시키지 않은 일을.
스스로/겸손함으로 고백할 수 있을까?

그것은 삭개오의 마음 가운데. 온전한 회심/변화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에.
이제는 더 이상 <나만의 세계>를 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내 이름의 뜻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운 자로. 깨끗한 자로. 순결한 자로" 살고 싶은 욕망이.
삭개오 안에서 꿈틀거렸던 것이다.

그래서 삭개오가. 우리 주님 앞에 이렇게 고백하는데.
이 고백을 듣고.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이 또한 놀라운 선언이지 않은가.
세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저 외인/주변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니.
이 일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 왔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먼저는. 오늘 우리 가운데.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삭개오의 갈망과 그의 탄식을 보고. 우리 주님이 찾아오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 속의 애탐과 탄식을 보시고.
"친히 찾아오시고. 친히 말씀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할 당시.
당신이 친구로 삼으셨던 이가 누구였던가?
세리와 창녀들 같이.
그 당시 사람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영적인 갈망과 목마름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고.
그래서 그것을. 겉으로는 표현하진 못하지만.
마음 곳 깊은 곳에서. 주를 향한 목마름과 애탐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면.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우리 주님을 맞이하거나. 그분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우리 주님은 그들의 모습을 보시며.
"이 사람들도 하나님 아버지/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가운데. 초대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 나라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 인생 가운데 주인으로 맞이하기를 원하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 앞에 오늘 우리의 문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 때.
주께서 우리 가운데 친히 찾아오시고 좌정하실 것을.
우리 주님이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님을 따라가며.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초대하기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로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우리는 그 음성 앞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그 음성을 듣고. 기쁨으로 문을 여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삭개오가. 주를 보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고. 나무 위로 올라갔던" 것처럼.
오늘 우리 인생도. 주님을 보기 위해.
"달려가고. 나무 위로 올라가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예수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길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해를 당하거나 우리 고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안위해 주시리라.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을 기뻐하는.
그런 복된 공동체. 그런 복된 우리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예수 따라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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