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후 2:14-26
'말'에는 힘이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이 땅을 창조하셨고.
주님은. '말씀'으로 아픈 자들을 고쳐주셨다.
죽은 나사로를 향해서는.
'나사로야 나오너라'는 '말씀'으로 그를 불러내셨고.
이 땅에 허무함과 슬픔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말씀'으로 소망을 주고. '말씀' 가운데 다시 일어나게 하는.
놀라운 일을 경험토록 하셨다.
이처럼. 말씀에는. 사람을 살리는 힘도 있지만.
동시에 사람을 죽이는 힘도 있다.
실제로 야고보 사도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약 3:6)"고 하지 않았던가.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왔다(약 3:6)"고 얘기하는데.
그만큼 말에는. <창조>의 능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파괴>의 능력도 있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말'이요.
사람을 죽이는 것도. '말'이라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도 바울도.
'말의 위험성'과 '말의 중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말>에 대해 계속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1) 14절을 보면.
"신도들에게 이것을 일깨우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그들에게 엄숙히 명해서. <말다툼>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다툼에는. 아무런 유익이 없기 때문이다.
말다툼은. 서로가 옳다고 하며.
자기 생각과 자기 주관만 늘여놓을 뿐인데.
거기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거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을 공간이 없다.
자기가 할 말을 준비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논리를 파괴시키고. 자기의 주장을 옳게 보일까 생각할 뿐이고.
그렇게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다가.
교회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서로를 파멸로 이끌어 갈 뿐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23절)>라고 말한다.
거기서 다툼/싸움이 생기고.
거기서 분열/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님은 종은 다투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잘 가르치고. 참을성 있게 대해야 하며.
반대하는 사람을. 온유하게/온화하게 붙잡아 주어야 한다(24-25절)고 하는데.
이것이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서로 하나되고. 연합하는 길인 것이다.
2) 속되고. 헛된 말을 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16절).
교회 안에서/성도들 사이에. 속되고 헛된 말을 할 때가 더러 있는데.
이것은 성도의 깊은 교제/나눔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 허탄한 마음과 실족한 마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다.
누군가를 놀림감 삼아서. 그를 비난하고 정죄하기도 하며.
세상의 헛된 소망과 부유함을 보면서.
그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그를 시샘하기도 하며.
자기 인생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그런 신변잡기 이야기만 하다가 보면.
교회 안에 성도들이 떠나가고. 그를 외면하게 된다.
"나는 말씀을 듣고 싶어서. 여기 왔는데. 이게 뭐하는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교제는. 교회 밖에서도.
언제든지/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도는. <속된 잡담>을 피하라(16절, 새번역)고 말한다.
이것을 개역 개정에서는. <망령되고 헛된 말(16절)>이라고 하며.
17절에서는. <악성 종양> 암 덩어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을 살리고. 건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고. 사람을 병들게 만드는. 불필요한 말/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3) 그렇기에 사도는. 우리가 거짓 진리/가짜 진리를 버리고.
오직 주의 말씀 앞에. 바르게 서기를 원한다.
거짓 진리는. 사람들을 죽이고 파멸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분별하고. 지혜 있는 자답게 살아가길 원한다(18절, 15절).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하는 자들과. 어울리지 말고.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과.
의와 믿음과 화평을 이루라고 말한다(22-23절).
이것이 성도의 교제. 하나됨의 유익이니.
우리가. '말'로 사람을 살리고. '말'로 진리에 이르기를.
사도 바울은 강력히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이 말씀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진실히 살아가길 원한다.
오늘 우리는.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오늘 우리는. 성도들과 어떤 나눔을 하고 있을까?
오늘 우리의 대화와 나눔 가운데. 우리 주님은 어디 있을까?
주께서 우리의 대화와 나눔을 보시며.
주께서 기뻐하시고. 즐거워하고 계실까.
아니면. 그분께서. 슬퍼하고 탄식하고 계실까?
나는 우리 공동체 안에.
허탄한 말과 인간적인 생각/피상적인 나눔이 그치고.
오직 주님 안에서. 참된 나눔과. 참된 진리가 온전히 선포되면 좋겠다.
성도들을 만나고 나면.
헛헛한 마음과. 속 빈 강정 같은 나눔으로 가득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의 삶과 나눔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드러나고. 그리스도께서 높임 받으시는.
그런 우리 교회 되고. 그런 우리 성도들의 나눔 되었으면 좋겠다.
때로는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온유한 말로. 사람들을 세워주고. 보듬어주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옹졸한 마음으로. 고집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중보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사. 회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면 좋겠고.
주께서 말씀으로 그들의 영혼을 깨우사.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사로 잡힌 바 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25-26절).
그래서 우리 모일 때마다. 주의 강력한 임재가 있으면.
주의 아름다운 나눔이 있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가 '말'로 사람을 세우고. '말'로 교회를 세우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인지.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이 찬양의 고백이. 마음 속에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우리 모일 때 주 이름 높이리.
우리 마음 모아. 주를 경배할 때. 주님 축복하시리. 주님 축복하시리.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우리 모일 때 주 이름 높이리.
우리 마음 모아 주를 경배할 때. 주님 축복하시리. 주님 축복하시리"
오늘 하루. 우리의 만남과 모임 가운데.
오직 주님이 임하시며. 오직 주님이 높임 받으시기 원하며.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 가운데.
오직 그리스도가 드러나며.
오직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삶의 열매와 성품이 나타나길 주님 앞에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하길 원한다.
(feat. 우리 모일 때 주 성령 임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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