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7:10-17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중에.
<아마샤>라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한다.
이 사람은 벧엘의 제사장으로서.
아마도 여로보암의 신복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는. 아모스가 전하는 메시지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왕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그것만 생각/궁리하곤 했었다.


그래서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선견자야. 너는 유대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에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에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나라의 궁궐임이니라(13절)"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꺼지라>는 것이다.
아모스의 말이 듣기 싫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을 거짓말로 만들어 버리고.
그를 추방하고. 그를 이스라엘에서 끌어내려고 한 것이다.

이에 아모스 선지자가.
"나는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일뿐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없어서. 내가 대신 이 말을 전하고 있다(14-15절)"고 말한다.

이것은 달리 말해서.
"이 땅에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왜 요 모양 요 꼴이냐"고 말하는 것이다.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요 모양 요 꼴이여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고.
그렇기에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가 말하기를.
"네 아내는 성읍 가운데서. 창녀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고.
이스라엘은 반드시 사로잡혀. 그의 땅에서 떠나리라(17절)"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주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역하는 자의 말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를. 정치적 반역자로 만들어 버리고.
오직 여로보암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에만 촉각을 세우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주의 자녀이며. 선지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아니라.
여로보암의 심복/개에 불과하였으며.
그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걷고. 정직한 길을 걷는 것보다.
자기 인생의 편안한 길. 빠른 길을 걷는데만 익숙한 자였다.

그러니. 그에게 어찌 하나님의 심판/형벌이 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선한 양심을 잃어버렸고. 결국 믿음에서 파선한 어떤 이들의 모습과 같았으며(딤전 1:19).
그의 마지막은. 참 비참하고. 비굴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 곁에도. <아마샤>와 같은 사람들이 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공의를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라"고 하였지만.
정치권의 개가 되어서. 그들의 마음을 흡족케 하는 자들이 있으며.
재벌가의 개가 되어서. 그들의 발을 핥아주고. 그들에게 꼬리치는 자들이 있다.

모 선교단체는. 불의한 정권과 야합하여.
땅을 받고. 그들의 독재와 그들의 불의를 옹호한 적도 있었으며.
어떤 이들은.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불의한 정권을 축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 적도 있었다.

실제로 2022년 4월.
극동방송에서 교계 지도자들을 불러놓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그때 그 모습이 얼마나 역하고. 추하게 느껴지던지.

정말 이분들은 윤석열이 대통령 되기를 바랐던 것일까?
손에 “왕”자나 새기고. 주술의 힘을 믿으며.
거짓과 불의로 가득힌 자에게.
그에게 무슨 소망과 꿈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많은 교계/교단의 지도자들이.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내며.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얘기를 하였다.
“그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라”고 하였고.
“앞으로 당신 인생 가운데. 주님의 복이 가득할
것이라“ 하였다.
이 모습이. 얼마나 안타깝고 슬프게 느껴지던지.

선교단체 대표로. 나 역시 그 자리에 초청을 받았지만.
나는 결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왜냐하면. 결국 그 자리는. 들러리를 서는 자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자리라고 생각하였으며.
거기 참석하는 것은. 결국 거기 굴복하고. 거기에 침묵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슬픈 것은.
오늘 대한민국이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지만.
그 자리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지도자의 잘못을 감춰주고. 허물을 덮어줘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어찌 부끄럽지 않은 일이며.
이 어찌 수치스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의 이미지를 생각할 때.
<가진 자. 권력자와 빌붙은 관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 앞에서.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지난 역사가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아침 말씀을 보는데.
<나단 선지자>의 삶과 사역이 다시 한번 생각나는 것 같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범죄하였을 때.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그를 해하였을 때.
다윗이 악을 행하고. 범죄하여도.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뭐라하지 않고. 참관하지 않을 때.
그때 나단 선지자가. 주의 말씀으로. 다윗을 훈계하고. 그를 교육하였던 것처럼.
나는 오늘 한국 교회가. 선지자의 외침을 회복하고.
선지자의 길로 바르게 살아가길 원한다.

오늘 우리 곁에.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케 하려는.
그런 거짓된 목소리. 그런 거짓된 삶을 그치고.
<누구 누구의 종. 누구누구의 딸랑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딸랑이>로 살아가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삶이.
말하는 것과. 행하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가벼운 삶.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 삶이. 주님 앞에 내실을 맺고. 결실을 맺는.
<진중한 삶. 열매 맺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 앞에 나아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주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아오리라.
나의 길.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아로리라"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의 상하고 깨어진 마음을 아시며.
오늘 우리 삶이. 주께 열납이 되며. 기쁨이 되길 원하며.
오늘 우리 삶이. 거짓 선지자와 같지 아니하며. 참 선지자가 되길 원하며.
오늘 우리 삶이.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종. 그의 딸랑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마음이. 진정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며. 그분의 딸랑이가 되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겸손히 주께 의탁하길 원한다.

(feat. 주가 보이신 생명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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