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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5:1-19
오늘 본문을 보면.
유다 지파가 땅을 유업으로 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남쪽으로는 사해 바다까지와.
동쪽으로는 요단강까지.
서쪽으로는 지중해 바다 인근과.
북쪽으로는 요단강 하구에서 예루살렘 인근까지.
넓은 영토를 분배 받게 되는데.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가장 넓은 영토다.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 가장 넓은 영토를 분배 받고 있는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재밌는 얘기가 나온다.
그것은. <갈렙과 악사. 옷니엘>에 관한 얘긴데.
갈렙에 관한 얘기는. 그렇게 크게 새롭진 않다.
왜냐하면? 어제 본문에서 갈렙은. 이미 등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옷니엘과 악사에 관한 얘기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얘기가 심상치 않게 전개된다.
실제로 오늘 본문 16절을 보면.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점령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을. 아내로 주겠다"라고 약속하는데.
이 일에 대해. 누가 발벗고 나서는가?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발벗고 나선다."
옷니엘이 기럇 세빌을 쳐서. 그 땅 주민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 일에 대한 약속으로. 옷니엘은 갈렙의 딸 악사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악사가 출가할 때가 되었는데.
악사는 아버지 갈렙에게 이렇게 요청한다.
"아버지. 저에게 복을 주시옵소서(19절)"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에게 좋은 것을 선물로 줄 법 한데.
갈렙이 악사에게 이상한 땅을 선물로 준다.
그 땅은 '네겝 땅'인데. 이스라엘에서 가장 쓸모 없는 땅 가운데 하나였다.
거기는 풀이 자라지 않는. 마른 광야와 같은 땅이었고.
아무도 살고 싶지 않은. 험지/황무지와 같은 땅이었다.
근데 그런 땅을 자식에게 선물로 주다니.
갈렙은 자기 딸 악사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갈렙은 자기 딸 악사를 험지로 몰아넣고 싶은 걸까?
참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갈렙은. 자기 딸 악사에게. '네겝 땅'을 선물로 주기 원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갈렙이. 자기 딸 악사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기 딸과 자기 사위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가길 바라서였다.
실제로 '네겝'이라는 지역이 그렇지 않은가.
거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거기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황무지/버린 땅과 같지만.
거기에 '비'가 내리면. 거기는 천하의 요지가 된다.
사막에서 불어온. 고운 황토가 그 땅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애.
물만 적절하게 공급해주면. 그 땅은 아주 비옥한 농토로 사용할 수있다.
실제로 현지인들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네겝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꽃들은. 유럽으로 수출하는 최상품/극상품이라고 하는데.
갈렙은 그 땅을. 악사와 옷니엘에게 주길 원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땅과 자신의 부를 의지하지 않길 바라서며.
오늘 그들이 하나님 안에서.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며. 철저히 하나님만 따라 살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악사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깨닫고.
"아버지. 그렇다면 샘물도 내게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윗샘과 아랫샘을 받아가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 가운데 주어진. 하나님의 복과 길이 아닐까 싶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게.
자식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만.
그것이 자식들에게 올무가 되고. 사슬이 될 것 같으면.
그것을 끊고 중단하는 것도.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지 않겠는가.
마치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공중에서 자식들을 떨어뜨리고. 떨어질 무렵 자식들을 낚아채는 것처럼.
오늘 우리도. 자녀들에게.
"고기를 잡아줄 것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줘야" 할 때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때론 우리를.
광야로 내몰고. 시험 가운데 우리를 두기도 하신다.
그것은 주님이 우리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주님이 우리를 징계하시고. 때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길 원하시며.
우리가 철저히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을 신뢰하길 원하시며.
오늘 우리가 그분의 뜻과 음성을 청종할 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참된 복과 은혜를 얻게 됨을.
가르쳐 주시고. 깨닫기 하기 위해서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함께 돌아보기 원한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광야와 같은 길이 있는가?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는가?
그렇다면. 그 때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그분께 매달려야 할 때다.
주께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바로 세우시고.
주께서 오늘 우리의 영혼을 단단히 세워주시길 바랄 때이다.
광야를 걸어가는 동안.
주께서 우리의 영혼이. 시험에 들지 않고. 낙심에 빠지지 않도록.
주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주께서 우리를 세워주시길 바랄 때이며.
주께서 광야로 나가시기 전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는 내 기뻐하는 자니라"라는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마음을 들어야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기에. 이 아침 말씀을 보는데.
이 찬양의 고백이 계속 마음 속에 맴도는 것 같다.
"왜 나를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두시는지. 어두운 밤은 왜 그리 길었는지.
나를 고독하게. 나를 낮아지게. 세상 어디도 기댈 곳이 없게 하셨네.
광야. 광야에 서 있네.
주님만 내 도움이 되시고. 주님만 내 빛이 되시는.
주님만 내 친구되시는 광야.
주님 손 놓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곳.
광야. 광에 서 있네.
주께서 나를 사용하시려. 나를 더 정결케 하시려.
나를 택하여 보내신 그곳 광야.
성령이 내 영혼. 다시 태어나게 하는 곳. 광야.
광야에 서 있네.
내 자아가 산산히 깨지고. 높아지려 했던.
내 꿈도 주님 앞에 내어놓고.
오직 주님 뜻만 이루어지기를. 나를 통해.
주님만 드러나시기를. 광야를 지나며"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광야를 지나는 법을 가르쳐 주시며.
광야 가운데. 우리 인생을 붙들어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우리 주님의 은혜와 그분의 법만을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의탁하길 원한다.
(feat. 광야를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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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
우리는 흔히. 젊은 사람을 가리켜. '이상주의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떤 일에 대한. 소망이나 야망이 있음을 뜻하는 말이지만.
또 그 이면에는 이런 뜻도 있습니다.
'이상'은 높고 갸륵하나. 그 일에 '현실성'이 없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바뀌기도 한다.
큰 꿈을 가지고. 위대한 계획을 세웠지만.
그 꿈이 현실 속에서 쉽지 않고. 어려움을 깨닫게 되자.
'현실주의자'로 도피하고. 그 안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실용주의자"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그 이면에는. 아픔과 슬픔의 역사가 있다.
왜냐하면. 현실을 논하는 사람들의 그 이면을 바라보면.
인생의 벽 앞에서. 숱하게 깨지고 무너진 흔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이상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바뀌게 되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꿈을 꾸고. 이상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사람들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래서 헛된 꿈을 꾸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생각을 말하고. 계획을 말할 때면.
"그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말하면서. 그 생각을 짓밟고. 꿈을 망가뜨릴 때도 더러 있는 것 같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말을 하면서도.
현실 속에선. 다른 생각을 품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근데. 오늘 본문을 보면.
그것과 정 반대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사람이 누구냐면? 그가 바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다.
실제로. 갈렙하면.
이스라엘 12 정탐꾼 가운데 한 명으로.
여호수아와 갈렙만.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지 않았던가.
모세가 이스라엘 12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냈을 때.
다른 정탐꾼들은. "그 성읍은 크고 강하며. 우리는 그들 보기에. 메뚜기 떼 같습니다"라고 말했는데.
여호수아와 갈렙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우리가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을. 우리가 받고.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그 땅은 심히 아름답고. 젖과 꿀이 흐르며.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주께서 우리 가운데. 그 땅을 주시고. 그 땅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민 14:7-10)"고 얘기하는데.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땅에 들어갈 것을 허락해 주셨다.
믿음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다른 정탐꾼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현실주의자의 길목에 서 있었다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의 눈으로. 주께서 하실 일들을 미리 보았기 때문이다.
근데 그런 갈렙이. 시간이 지나서도. 그 마음이 변치 않고. 쇠하지 않은 것을 보게 된다.
실제로 오늘 본문 10절을 보면.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슴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으니.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이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10-12절)"라고 말하는데…
그에게 후퇴나. 뒤로 물러섬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앞으로 행진. 전진만 있을 뿐이다.
그때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꿈을 꾸었고.
오늘도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꿈을 꿀 뿐이다.
현실적인 타협이나. 특혜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 당시 헤브론 성읍은. 아낙 자손의 성읍으로.
옛 이름이. '기럇 아르바'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아르바 - 그 당시 아낙 사람 가운데서. 가장 키가 크고 힘이 센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그 성의 이름을 '기럇 아르바'라고 했었는데…
이 일에 있어서. 자기가 결코 뒤로 물러서질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이런 일들을 많이 했으니.
나에게 좀 쉬운 일을 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내 나이가 이제 많아서 힘드니.
이제 힘든 일은. 젊은이들이 하고. 나는 좀 뒤에 앉아서 쉬겠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오직.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이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갈렙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하신.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9절)"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며.
"오늘 이 성읍이. 아무리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고 승리할 수 있다(12절)"는.
주님의 약속. 당신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갈렙과 그의 가족은. 헤브론으로 진격하여.
그 땅을 점령하게 되는데.
오늘 본문 15절을 보면.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리고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늘 우리 삶의 안녕과 평화는.
현실 속에 길들여지고. 현실 속에 파묻히고.
현실 가운데 타협하고. 현실 가운데 놓여지게 될 때.
그때 우리에게 평화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꿈을 꾸고. 하나님 안에서 비전을 품으며.
하나님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하나님 안에서 나음을 입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오고.
그때 비로소 우리에게. 전쟁이 그치고 승리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안에서 꿈꾸고 요동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꿈이 사그라지고. 시들어가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꿈을 꾸고.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위대한 일을 논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요엘서 2장 28절과 29절의 말씀이 계속 생각나는 것 같다.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라(욜 2:28)"고 말씀하시는데.
오늘 이것이. 어찌 요엘 선지자의 고백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요엘 선지자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젊은이만 이상을 꾸고.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늙은이도 꿈을 꾸고. 이상을 말해야 하며.
자녀들은 앞으로의 일을 말하며.
하나님 안에서 원대한 꿈/그분의 일하심과 그분의 역사를 기대해야 하며.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물들어 가고. 깊어져 갈 때.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그 나라를 우리 손에.
움켜쥐고.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서기 원한다.
"마지막 날에. 내가 나의 영으로.
모든 백성에게. 부어 주리라.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이 임하면.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청년들은 환상을 보고.
아비들은 꿈을 꾸리라. 주의 영이 임하면.
성령이여. 임하소서.
성령이여. 우리에게 임하소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하나님의 영에 취해서.
그날의 일을 꿈꾸고. 믿음으로 그 땅을 바라봤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분의 영이 충만한.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갈렙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믿음이 하나도 약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안에서. 오히려. 원대한 꿈을 꾸고.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 가운데.
주께서 그와 같은 은혜를 주시며. 주께서 그와 같은 영광/승리의 노래 부르게 해 주시길.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담대히 길을 걷는.
나와 우리 공동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feat.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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