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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5.01.29 :: 2025.01.29(수) 수 19:24-51

수 20:1-9

출애굽기 21장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이것은 그 당시. "동태복수법"을 담은 것인데.
처음 이 말씀을 볼 때는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혜와 자비를 말하는 하나님이.
어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는 말씀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것이 가혹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의 복수심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여서.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눈에는 눈과 이로 갚아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라멕이 하는 말이 그것이지 않은까?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라고 말하는.
라멕의 폭력을 보면서.
우리는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우리는. 내가 피해를 입으면. 배로 앙갚음하고.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르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수심으로 불타오르는 우리의 마음을 제어하기 위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은 오늘 우리가. 앙갚음하고 되갚음하라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우리의 죄에 대한. 응당한 댓가가 있을 것을 경고하는 말씀이며.
그렇기에 우리가. 죄를 짓지 말고. 피해를 주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오늘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피해를 입게 된다면.
"거기까지. 딱 거기까지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고통을 겪은 것은. 훨씬 더 크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배로 갚아주고. 배로 앙갚음 하고 싶은 욕심/욕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그치고. 거기까지만 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누군가를 죽이고. 목숨을 잃게 한다면.
이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성경에 이에 대해. 일차적으로.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출 21:12)"을 명시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을. 반드시 그렇게 하라고 말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웃과 함께 나무를 하려고 산에 들어갔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 이웃을 맞춰 죽이게 된다면.
그것은 고의가 아닌. 실수이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구하고. 건질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도피성 제도>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누군가 실수로 사람을 죽이게 되면. 도피성으로 찾아가.
그곳 장로들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고대 근동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제도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피에는 피로 갚아야 하는데.
어찌 이렇게 사람을 보호하고. 그를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보존하고. 지키길 원하셨다.
그가 고의가 아닌. 실수로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도 이 죄에 대해. 심각한 잘못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목숨을 구원할지언정.
자기 가족과 떨어지고. 멀리 구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 성에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이 일에 대한. 올바른 재판을 받거나. 대제사장이 죽는 일.
그것 밖에 없었는데.
주님은 이 일을 통해. 그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이스라엘을 피의 복수로부터. 구하고 구출하기 원했다.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전역에. 6개의 도피성을 만들게 되는데.
오늘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의 모습을 예표하는 것 같다.

실제로 성경은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 오늘 우리에겐. 이와 같은 사망/영원한 형벌이 주어져 있다고 말하는데.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임을 함께 말하고 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채. 이방인/도피성 밖에 머물고 있다면.
우리의 끝은 사망이요.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형벌/심판이 주어져 있지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고. 그분 곁으로 피하게 되면.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게 됨을.
우리 주님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1)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도피성 안에 머물게 하시고.
2) 그 성이. 오늘 우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마음만 먹고. 뜻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찾아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도피성을 6개나 두시고.
3) 또 그 가운데는. 유대인만 찾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이나. 거류민이나. 다른 민족/다른 나라 사람들도 마음껏 찾아갈 수 있으니.
그 은혜와 사랑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 아침.
우리를 구원하사. 우리를 주님의 자녀 삼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안에 머물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얻고. 주와 동행하게 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분을 찬양할 따름이다.

오늘 우리의 연약함과. 오늘 우리의 모남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길 소망할 따름이며.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 품안에 영원히 거하기를.
이 시간 찬양하며. 그분께 감사로 나아가길 원한다.

그래서인지. 이 아침 말씀을 보는데.
이 찬양의 고백이 계속 생각나는 것 같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 인해 감사. 주 내 안에 계시네.
향기론 봄철에 감사. 외론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헤쳐나온 풍랑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 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주신.
그분의 찬양하는. 그런 하루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그분의 은혜 가운데로. 그분의 그늘 가운데로.
사랑하는 친구들을 초대하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초대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이 시간 주님 앞에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주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올려드리길 원한다.

(feat. 날 구원하신 주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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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19:24-51

땅 분배가 마무리 되었다.
유다 지파부터. 단 지파까지. 이스라엘 12지파의 땅 분배가 마무리 되었는데.
재밌는 것은. 가면 갈수록. 그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다 지파의 땅 분배를 할 때면.
여호수아 15장 전체를 할애했으며.
그 성읍만 하더라도. 120개가 훌쩍 넘었는데.
19장에서는. 6지파의 땅 분배를 한꺼번에 처리하고 있다.

속전속결이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듯하다.
이것은 남겨진 일곱 지파가. 아직 그 땅을 정복하지 않고. 지체했기 때문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 안에서. 소수 지파/변두지 지파였기 때문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주변 마을/변두리로 밀려나게 되는데.
오늘 이것이. 그들 안에 있는 아픔/상처이기도 하다.
사람이라고 하면. 누구나 그 중심으로 들어가고. 핵심 인물이 되고 싶은데.
오늘 우리에게 그럴만한 힘과 능력이 없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주변부 인생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기억하시고. 찾아가시는 하나님이시다.

실제로 마태복음 4장 12절과 13절을 보면.
"우리 주님이.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마 4:12-13)"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룸이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의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5-16)"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 주님이 어떻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매몰차게 내칠 수 있겠는가.

주님은 사망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제일 먼저 찾아가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고. 그들을 위로하기 원하신다.

세상에서는 힘 있는 사람. 능력있는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줄 서기 원하지만.
우리 주님은.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기억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왔을 때.
'세리와 과부의 친구가 되시고.
아픈 자들과 눈물 흘리는 자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는데.
나는 오늘 그 하나님이. 오늘 우리 삶 가운데도 가득했으면 좋겠다.

실제로 오늘 구정 연휴를 맞아.
많은 이들이 웃음꽃을 피우며. 즐거움을 나누고 있지만.
그 가운데는. 아픔과 슬픔을 마주하고 있는 자들도 있다.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서. 마음의 아픔으로 인해서.
또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 때문에.
누군가는 비교의식과 상대적인 열등감 때문에.
아파하고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오늘 그들에게. 주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찾아가 주시길 바란다.

나와 오늘 우리 공동체가. 그들의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고.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자들과 함게 웃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우리 백성들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외딴 섬'으로 전락하고. '나홀로' 살아가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늘 우리가. 더불어 함께 살아가며.
오늘 우리가. 더불어 함께 기쁨을 누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자매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의 모임 중에 임하신. 하나님 영광 아름다워라.
존귀한 왕이 여기 계시니. 사랑하며 섬기리"

우리 주님이. 사망과 흑암의 땅을 찾아가시고.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을 붙들어 주셨던 것처럼.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도. 하나님 안에서. 그와 같은 삶 살아가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그분께. 겸손히 의탁하여 드리길 원한다.

(feat.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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