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4:21-33
암논이 다말을 범한 이후로.
다윗의 집안은. 콩가루가 되어 가고 있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다말은. 몸과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압살롬은. 아무런 반성과 회개도 보이지 않는. 암몬을 향해.
칼을 가누고. 그를 죽이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압살롬은. 그술 땅으로 피해. 3년 여의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그 사이. 다윗의 몸과 마음 또한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사무엘하 13장 39절에 대한. 개역 개정 성경은.
좋은 번역은 아닌 것 같다.
개역 개정에서는.
"암논이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다(개역 개정)"고 말하는데.
과연 어느 아버지가. 자녀의 죽음을 두고. 위로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번역이다.
그래서. 새번역 성경에서는.
이것을 조금 보완하여. 이렇게 번역한다.
"그러는 사이(압살롬이 그술 땅으로 도망쳐 있는 3년 동안).
다윗 왕은. 암논을 잃었을 때에 받은 충격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뒤이어 이렇게 덧붙인다.
"다윗이. 압살롬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점점 더 간절해졌다(새번역)"
하지만. 이 마저도.
다윗의 마음을. 완전히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다.
다윗은. 말 그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이전 일에 대한 기억/상처가 조금 아물었을 뿐이지.
사실 아직도.
압살롬을 향한. 마음의 상처와 분노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요압의 청을 따라.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이는 것은 허락하지만.
그를 만나러 가지도 않았고.
압살롬이 자기를 찾아오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다윗이. 여전히 압살롬을 향해.
못 마땅한 마음(분노와 슬픔, 증오)을 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압살롬을 매정하게 대하며.
먼 발치에서. 그가. 조용히 살 것을 종용하였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자그만치 2년의 시간 동안 말이다.
압살롬의 입장에선. 이것이. 생 지옥이었다.
이럴 거면. 차라리 그술 땅에 있는 게 나았을 텐데.
아버지 다윗의 눈 밖에 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서글프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렇게 항변한다.
"장군. 나를 왜 여기로 돌아오게 한 것이오.
여기에서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그 곳에 그대로 있는 것이. 더욱 좋을 뻔 하였소.
궁으로 돌아온지. 2년이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소.
혹시. 나에게 아직도 무슨 죄가 남아 있으면.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고 말하여 주시오."
결국. 이 일로.
다윗은 압살롬을. 자기 앞으로 데려오며. 그와 입을 맞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압살롬의 마음은. 이미 상할 대로 상해있었고.
그는. 반역을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의 집에 벌어진 일이었다.
다말 강간 사건은. 암논 살해 살건을 불러 일으켰으며.
암논 살해 사건은. 다윗 가정의 파탄/분리를 가져왔으며.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분노/매정함은.
압살롬의 반역과 분노를 사게 되었고.
결국. 다윗은. 광야로 다시 한번 내몰리게 되는. 일을 겪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탕자의 비유가 오버랩 된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에..
다윗이. 압살롬을 불러오며. 그를 맞아주고. 그를 안아주었다면 어땠을까?
지난 시간 동안. 압살롬이 어떻게 지냈는지. 한 번이라도 물어봐 주고.
또. 자기도.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얘기라도 했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 갈라지진 않았을 텐데.
왜 다윗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사랑/용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윗의 모습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만약에 다윗이…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와 사랑을 받았는지. 기억했다면.
압살롬을 그렇게 매몰차게 대하지만은 않았을 텐데.
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입었으면서.
압살롬을 향해서는. 왜 그런 은혜와 사랑을 베풀지 못했을까.
참 안타깝고. 쓸쓸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용서와 화해는.
엄연히 시점도 다르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를 놓쳐 버리면.
모두가 상처를 받고. 피해자로 남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정직히 마주볼 수 있는. 은혜/용기가 필요하다.
형제자매를 불쌍히 여기며. 그를 긍휼히 여기는 은혜가 필요하고.
그들을 용납하고. 품을 수 있는. 넉넉한 마음과 사랑 또한 필요하다.
형제자매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볼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들보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 또한 필요하고.
형제자매의 잘못을 판단하고. 책망하는. 날카롭고. 예리한 눈 뿐만 아니라.
주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용납하고. 사랑하신.
자비의 눈 또한 필요하다.
그래야. 온전한 회복과 평화가 주어지며.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본받길 원한다.
주께서. 우리의 연약함과 허물을 덮으시며.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처럼.
우리 또한 형제자매의 연약함과 허물을 덮어주며.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길 원한다.
죄는 죄를 불러오며.
심판은 심판을 불러오며.
악은 악을 갚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선으로 악을 이기며.
사랑과 용납으로. 형제자매의 허물과 죄를 덮어주며.
이 땅 가운데. 온전한 회복과 평화가 임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 모두가.
주님 앞에서.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주께 온전히 의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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