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3:14-22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적지근한 교회였다(16절).
자신의 처지를 깨닫지도 못하는 교회였고(17절).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그저 관성대로 살아가는. 목적도 방향성도 없는 교회였다.

그렇기에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엄중히 책망하신다.
홧김에. 그냥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사랑하는 마음에.
애끓는 마음으로. 그들을 책망하고. 꾸짖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19절 말씀을.
나의 말로 옮겨 적으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에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도무지 포기할 수 없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니.
너는 열심을 내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그것이. 너를 향한 나의 마음. 나의 바람이란다."


내가 어찌 이 마음을 모르겠는가.
아이들을 키우며. 하루에도 12번씩 잔소리를 하며.
아이들을 달달 볶는 내 마음이. 이와 같다.

"밥 좀 먹어라. 싸우지 좀 마라. 말 좀 들어라."
사실 다른 이유로. 아이들과 실랑이 할 것이 없다.
늘 같은 이유로. 잔소리를 하고.
늘 같은 이유로. 아이들과 싸우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아이들에게 같은 말로 마무리하게 된다.

"누구야. 아빠가 너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고.
아빠가 널 사랑하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야.
아빠가 너한테 아무런 얘기도 하지 말까?
우리 그냥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아무런 신경도 쓰지 말까?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누구도 아빠 말 잘 듣고. 노력해 주면 좋겠어!"

그때마다 아이들도. '알겠다'며 약속하고 돌아서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 둘의 대화는. 다시 반복되는 사이클로 들어가고 만다.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인가 보다.
언제쯤 이 사이클이 멈출 수 있을까?ㅎㅎ


그런 측면에서. 이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누군가의 잘못을. 70번씩 7번. 용서해 주라고 하셨을 때"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그런 사랑으로. 나를 받아주고 사랑해 주셨던 분이 계시다.
우리 부모님께서. 어린 시절. 나의 잘못을.
그렇게 용납하고 품어주셨으며.
사랑하기에. 하루에도 12번씩 잔소리를 하며.
우리를 향해. 끊임없는 책망과 징계를 하셨나 보다.


그렇기에.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끊임없이 책망하고. 말씀하신다.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거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기다려 주기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개입하기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혼내기도 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때로는 안아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따라. 20절 말씀도. 새롭게 읽힌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겠다"는 말씀이.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으라는 얘기가 아니라.

나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과 관심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열고. 나를 받아줄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주께서. 우리를 향해. 끊임없는 잔소리와 책망과 징계를 하실 때.
우리의 마음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가. 꽁하니 숨어있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그의 음성을 듣기 원하시는.
주님의 권면/초대처럼 느껴진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주님은 나에게 뭐라 말씀하실까 생각해 본다.

주님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는.
"미지근한 상태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생을 살지 말고.
차든지. 뜨겁든지. 어느 짝에도 쓸모가 있는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 주님은. 나/우리를 향해.
뭐라고 책망하며. 잔소리하며.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실까?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주님이 내게 뭘 원하시는지. 사실은 다 알고 있다.

주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리고. 그 이야기는 하루 이틀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모르거나.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야.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 다해. 내 얘기를 들어주고. 내 마음을 받아주면 좋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널 위한 소리이고.
이 모든 게 다 널 위해서. 널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란다.
네가 언제쯤. 내 얘기를 귀담아 들어주겠니?
네가 언제쯤. 마음의 문을 열고. 나에게 나아오겠니?
네가 언제쯤. 나와 더불어 살며. 나와 함께 그 기쁨을 누리겠니?"


바라기는. '오늘'이 그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히브리서 기자가.
"오늘. 너희가 그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고.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매일 피차 권면하여.
누구든지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잔치/안식에 참여한 자가 되라(히 3:7-14)'고 말씀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고. 그의 자리로 나아가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님께 의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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