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2:1-7
모세의 율법에는.
"곡식 거둘 때에.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라(레 19:9)" 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작은 배려와 사랑의 실천을 얘기하는 것이다.
쌀 한톨까지도. "내 것"이라 집착하지 말고.
그들을 향해. 넉넉한 마음으로.
자비(헤세드)를 베풀라는 것이다.
룻이 모세의 율법을 얼마나 알았을까?
아마도. 충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주변 풍경을 보면서.
"저기. 이삭 줍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궁금했을 것이고.
"이것이 모세의 율법에서 허용되는 것이구나"
하는 정도의 지식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오미에게. 먼저. 이삭 줍기를 제안한다.
생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기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을 취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것이다.
룻이. 설렁설렁 이삭을 줍지 않는다.
사람들의 눈치/시선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삭을 줍는다.
혹시나 사람들이 자기를 해하지는 않을까.
두려움과 염려에도 불구하고.
홀로 이삭을 줍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틈나는 대로. 일꾼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혹여나. 이삭 한 톨이라도. 더 주울 수 있다면.
재빨리. 몸을 움직이며.
이삭 줍기에 열심이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열심이게 하였을까?
그것은. 나오미를 향한. 인애와 사랑 때문이었다.
한 사람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수치와 위험마저도 삼켜 버린 것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모습이 아닐까?
수로보니게 여인이. 사랑하는 딸을 향해서.
개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처럼.
부스러기 하나라도 좋으니.
제발. 우리를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룻이.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다.
룻의 모습을 보면서.
율법의 말씀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상관 관계를 생각해 본다.
"많은"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완벽하게" 말씀의 뜻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전문적인" 지식을 소유하지 않아도 된다.
"단 하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말씀이. 우리의 삶에 실제가 되어서. 이 말씀대로 살아가며.
율법의 정신을 향유하고.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이뤄질 것을 기대하는 마음.
그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 아닐까?
나는. 인애와 자비의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인애와 자비를 구하며.
인애와 자비를 나누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공의와 정의를 구하며.
공의와 정의를 이루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 이것을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 10:42)"는 말씀처럼.
오늘 우리의 삶이. 그러하길 소망한다.
하나라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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