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2:10-16
오늘 본문을 읽으며. '가인'이 떠올랐다.
가인이 누구였던가. 동생 아벨을 죽였던 사람이 아니던가.
하나님이 '아벨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은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몹시 화가 났다. 하나님께 묻고. 따졌다.
그리고. 화를 참지 못해. 아무도 없는 빈들에서. 동생 아벨을 쳐죽였다.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마음대로. 막가파 식의 삶을 살았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지 않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비난하는. 미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모습도 그러하다.
그들은. "주님께서 우리 제물을 외면하시며. 그것을 기꺼이 받지 않으신다"며.
눈물과 탄식으로. 주님 앞에 묻고 따졌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 도대체. 왜. 무슨 까닭으로. 우리의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까?"
여기까지만 보면.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단지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예배 방식/형식/제물의 문제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가인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받지 않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그가 바친' 제물을 받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개차반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늘 본문이 이스라엘의 부도덕하고. 완악한 모습을 고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며.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하며.
신실한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장가들려 하였다.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골라서 하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하고 원망하였다.
자신들의 잘못은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책임을 전가시킨다.
이것이 비극이다.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세계 안에 갇혀서.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죄.
하나님을 조종하고. 업신여기는 죄.
이것이. 그들의 비극이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버린. 완고하고. 어리숙한 모습 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눈물을 지을 뿐이다.
이스라엘의 완악하고. 어리숙한 모습에. 탄식의 눈물을 지을 뿐이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섬긴다’ 하지만.
실제 삶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은 아닐까?
자기 잘못을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영적인 무감각/문둥병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측면에서.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기를 깨닫지 못하는 것 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이것이 가장 큰 비극이고. 이것이 가장 큰 영적인 절망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돌아보며. 매일마다 영적인 성숙과 갱신을 이뤄가고 있는가?
바라기는. 나와 우리 공동체가 그러하길 소원한다.
깨끗한 거울을 마주하듯. 주님을 마주하며.
투명한 거울을 통해. 나의 잘못과 연약함을 깨달으며.
진실한 거울을 통해. 주님 앞에 나아가길 소원한다.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를 깨닫는 것이. 축복의 시작이다.
나의 잘못을 알고. 나의 허물을 깨달을 때. 참된 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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