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1:10-32
데라는. 갈대아 우르를 떠나. 다시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그래서 가족들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마음의 소망을 품고. 작정하고. 길을 나선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하란에 이르러. 거기에다 자리를 잡고 살고자 하였다(31절).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고 험해서.
잠시 자리를 잡고. 쉬는 것도 아니다.
아예. 그곳에 자리를 잡고. 죽을 때까지 평생 그곳에 머무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하였을까?
왜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하란에 자리를 잡고. 거기서 평생을 살았던 걸까?
학자들은.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한다.
1) 하란이 너무 매력적이고. 살기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데라가 그곳에 자리를 잡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역사적 자료를 살펴보면.
그 당시 하란은. 갈대아 우르보다. 더 화려하고 번성한 곳이었던 것 같고.
고대 도시의 흔적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데라는. 거기에 자리를 잡고 눌러 앉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가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보였고.
여기서 살면. 남은 여생을.
보다 편안하게/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2) 데라가 하란에 머무른 것은.
막상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가 두려웠던 것으로도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사람이 그렇죠.
처음에는. 어떤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할 때.
용기있게. 자신있게 선택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이 결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간에 가다가 트는 경우도 많이 있고.
마지막에 가서. 최종 결정을 할 때. 틀어지는 경우도 허다하게 있습니다.
데라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데라는 분명. 처음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자신있게/용기있게 길을 나섰지만.
막상 마지막 단계에 오니.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란에 주저 앉은 거지요.
마지막 문턱. 경계를 결국 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 앉은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데라는. 반쪽짜리 인생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처음에는 의욕차게/신나게 길을 나섰지만.
결국에는. 바벨론 땅에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았으니.
그의 부르심은. 못다한 부르심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보다 보니. 데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에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우/실수를 범하였다.
실제로 룻기를 보면.
나오미가 모압 지방을 떠나. 이스라엘로 돌아오려고 할 때.
누가 그의 곁을 따라가는가?
나오미의 며느리였던. 룻과 오르바가.
함께 일어나. 함께 길을 나선다(룻 1:6-7).
하지만. 마지막 문턱/경계에 이르러.
오르바는. 결국. 자신의 고향집으로 돌아간다.
처음에는 의욕차게 길을 나섰지만.
마지막 순간에/마지막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룻은 어떠한가?
그는 끝까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갔다.
중간에 낙오하고. 경유지에 자리를 잡고. 눌러 앉은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고백 속에.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길을. 끝까지 완전히 걸어간 것이다.
오르바만 그랬던가? 베드로도 그랬다.
주께서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했을 때.
그때 당신의 제자들이 뭐라고 말하였던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초막 셋을 짓고 삽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부르심이고 뭣이고 간에.
지금 여기가 살기 좋은데. 뭣이 중하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현실에 현혹되어. 거기 눌러 앉아 있지 않으시고.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과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셨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 같다.
"나는. 목적지를 바라보며. 인생을 살아가는가.
아니면. 경유지에 눌러앉아. 인생을 살아가는가?"
"나는. 첫 끗발이 개끗발인 인생을 살아가는가.
아니면. 뒷심이 좋은 인생을 살아가는가?"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데라와 같지 않고. 오르바와 같지 않으면 좋겠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끝까지/온전히/다 이루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부르심을.
완전히/온전히 이루는. 그런 공동체 되길 소원한다.
그렇기에. 이 아침. 이 찬양을 부르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이 땅을 바라보며 살지 아니하고.
우리의 영원한 본향이신. 하나님나라를 바라보며.
오늘 이 땅을 살아간다.
(feat. 하늘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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