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6:19-31
이스라엘 백성들은. "부"를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생각하였다.
율법의 말씀이 그렇고. 믿음의 선진들의 모습이 그랬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주의 말씀을 따라 길을 나섰을 때. "너는 복이 될찌라"라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의 삶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축복을 더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와 같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구약 성경을 보면.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안녕하고 평안한 모습으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안에서. 넉넉하고. 평안한 삶을 살았다.
이것이. "복"에 대한. "재산"에 대한. 그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만 주어진 복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사회적 책무"와 "역할" 또한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위한. 십일조를 말씀하시고.
추수할 때에. 그들을 위한. 이삭을 남겨놓을 것과.
형제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말 것과.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명시하셨는데.
이 모든 것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의 손길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기억하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
주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은혜와 복을 주기 원하시지만.
이것은. "나를 위한/나만을 위한" 복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모든 사람을 위한" 복인 것이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그와 같은 삶을 살진 않았다.
그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삶을 살았지만.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 하나도. 돌보고 살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편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불쾌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마치. 특수 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항의했던 사람들처럼.
여기 거지가 들어앉아 있어서. 우리집이 폼이 안 난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자들의 눈에. 거지 나사로는. 긍휼과 자비의 대상이 아니었다.
부자들의 눈에. 거지 나사로는. 옥의 티처럼 보였고.
그는. 눈엣가시처럼. 꼴보기 싫고.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지 나사로가. 자기 집 앞에 있는데도.
아무런 관심과 돌봄을 기하지 않았다.
그가. 날마다 굶주리고. 그가 날마다 잔반을 처리하며.
그의 몸에 상처와 곪은 곳과. 헌 곳이 가득하여도.
그들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고. 아무런 요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부자들의 모습과. 개의 모습이 대비된다.
개들은. 와서. 그의 상처를 핥아주며. 그를 불쌍히 여기는데.
부자들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으니 말이다.
그들은. 개만도 못한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부자에게. 엄중한 심판을 내리신다.
부자라서. 지옥에 내려간 것이 아니다.
부자라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에. 이웃을 향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가 매일 같이. 허랑방탕하며.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이며.
그가 율법의 말씀을 무시하며. 그것을 경시하고. 그것을 사사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살아난다고 해도. 그들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와.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갔다.
그들이 자랑하는 것은. 돈이었으며.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은. 돈이었으며.
그들의 삶의 유일한 소망과 목적 또한 돈이었으니.
이것이. 그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죽음의 늪으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함께 돌아본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
얼마전.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큰 도전을 주었는데.
오늘 우리 삶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경주 최부자댁의 가훈을 보면.
"재물은. 똥거름과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서 견딜 수가 없고.
골고루 흩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라고 했는데…
김장하 선생님은. 이 말씀을. 자신의 삶의 교훈으로 삼고.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며. 열매를 맺었는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우리는. 여전히. 배움과 지식이 부족해서.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지향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우리의 실천과 나눔이 부족한 걸까?
야고보서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라고 얘기하는데.
오늘 우리는. 자기 마음을 속이며. 다른 사람을 속이는. <헛된 경건>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정말 흠이 없고. 경건한. 참된 경건>을 구하며 살아가는가?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자기만 고운 베옷을 입고. 자기만 배 부르게 먹고.
자기만. 날마다 즐겁게 호사롭게 지내는. <어떤 부자>와 같지 아니하고.
<보아스>처럼.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가난한 사람들을 살피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우리 삶이.
"나를 위한" 복과. "나를 위한" 안녕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한" 복과. "모든 세상을 위한" 복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고.
주께서. 선한 청지기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시고. 더 많은 것을 부어주시니.
오늘 우리가. 주님의 복과 은혜를 따라.
더 많은 것을 감당하고. 더 많은 것을 실천하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원한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 조차 없는데.
평안히 가서 따뜻하게 하고. 배불리 먹으라 말만 하고.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경건은 어려움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 깨끗케 하는 것이라.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것 조차 없는데.
평안히 가서 따뜻하게 하고. 배불리 먹으라 말만 하고.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지극히 작은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자는 결코 자기의 상을. 잃지 않으리라 주님 말씀하시네.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흠없는 경건은 어려움 중에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 주며. 자기를 지켜 깨끗케 하는 것이라.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예수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성령님께서 계시도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아버지께서 계시도다."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
<흠 없는 경건>을 살아가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흠 없는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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