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3:1-6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룻과 나오미는. 이삭을 주우며. 생계를 유지했고.
그들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나오미가 말한다.

"얘야. 네가 행복하게 살 만한.
안락한 가정을 내가 찾아보아야 하겠다.
우리 친족 가운데. 보아스라는 사람 있잖니?
그 친구 어떻니?"

아마도. 보아스라면. 룻을 거둬주지 않을까?
나오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뒷 이야기가. 아주 도발적이다.
꽃단장을 하고.
몰래. 그에게 다가서서.
그의 발치를 들고 누우라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나?
성경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공세를 요하고 있다.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하는 말이 아니다.
"생각해 봐" 그리고 "잘 들어 보라"며.
나오미는 지금. 진지하게 이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룻은. 어머니의 얘기를 듣고.
"Yes!"라고 답한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사실. 오늘 본문을 보면. 난해하게 느껴질 것이다.
오늘날 사회적인 통념, 윤리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쉽게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의 문화에서 보면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대를 잇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그렇기에 남편이 죽게 되면.
"형제/친족들"을 중심으로.
"누가 이 기업을 무를 것인가" 하는 질문을 남기곤 하였다.

나오미는.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다.


이러한 나오미의 모습 속에서.
다말이 떠오른다(창 38장).

남편(엘)이 죽은 뒤.
다말은 기업 무를 자를 기다렸으나.
동생 오난도. 아버지 유다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결국. 다말은. 도발적인 계획을 저질렀다(?).

하지만. 이 일의 결국이 무엇이었냐면.
"다말의 의로움"이 입증되었고.
다말은 약속의 유업을 잇게 되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약속의 유업"을 잇기 원하는. 다말과 나오미.
그들의 모습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며.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나는. 그 나라를 얻기 위해. 도발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약속의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을 구하며.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고. 책임질 것을.
하나님께 당당히(?) 요하고 있는가?

하나님은. 때론. "겸손히 구걸(?)" 하는 모습 보다.
아버지께 나아가. "당당히 요청"하며.
말씀의 명시대로. 우리를 돌보아 줄 것을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사랑받는 자녀들의 관계처럼 말이다.

나도. 우리 아이들의 모습처럼.
아버지께. 당당히. 나아가며.
또한 스스럼 없이. 요청하는.
그러한 믿음을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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