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12:1-14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 한들. 무슨 소용 있겠는가.

다윗의 인생이 그렇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이고.
그렇게 사람들을 속이고.
완전 범죄를 하였다 생각했겠지만.
하나님만큼은. 결코 속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잘못을 책망하신다.
다윗의 은밀한 죄를 들춰내시며.
다윗의 잘못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으신다.

그러자. 다윗은. 그제서야 주님 앞에 나아온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자신의 허물과 어리석음에 대해. 그제서야 토로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다가.
본문 13절에. 계속 눈길이 머물게 된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과 꾸짖음 앞에서. 다윗이 뭐라고 말하는가?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13절)"

다윗은. 하나님 앞에. 구구절절 다른 변명을 하지 않는다.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둘러대며.
어떻게든. 자기를 합리화 하고. 포장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솔직. 담백하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내가". 이 잘못을 범하였다고 말하며.
내가. 밧세바와 우리야 뿐만 아니라.
"주님께". 죄를 범하였다고 말하며.
이 모든 일의 책임이.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다윗의 잘못을 용서하시며.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

다윗의 회개가. 책임 회피/면피용 고백이 아니라.
정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이키고 있는 것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에게/우리에게 물어본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과 꾸짖음 앞에. 어떤 모습으로 반응하는가?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이라 하셨건만.
오늘 우리는.
이 땅의 죄와 고통에 대해.
얼마나 애통하고. 통애하는 심령으로 살아가는가?


정직히 돌이켜 보면. 우리는 회개와 참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우리는. 변명하기 바쁜 사람들이고.
어떻게든 자기를 합리화 하고.
자기를 정당화 시키는데. 참 능숙한 사람들이다.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유/변명들을 늘여 놓으며.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거나.
이 시대의 문제. 구조적인 문제로 귀결시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앞에 통애하는 심령으로 나아가기 보다.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물타기 할 때도 잦아지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실까?
계속해서. 자기를 변호하는 데만 바쁘고.
입만 살아있는. 저 죄인들을 바라보며.
주님이 얼마나 눈꼴사나우실까?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에게. 통애하는 마음이 있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의 용서와 자비를 입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유를 둘러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님.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이 아침. 누가복음 18장에 기록된. 세리의 기도가 계속 생각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나는 이것이.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드려야 할 기도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뭘 잘했다고. 당당히 얼굴을 들고 나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그저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그저. 가슴을 치며. 애타게 주님을 찾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내일 뿐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렇기에. 이 시간.
주님의 자비와 인애를 구하며. 주님 앞에 나아간다.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님의 자비를 베풀어 주시길.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길.
주께서. 우리에게. 깨어진 마음과 상한 심령을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를. 주께 의탁한다.

posted by The Sab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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