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7:1-13
사사기 마지막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패역상이 얼마나 깊은 지를 보여준다.
오늘 본문도 그러하다.
에브라임 산간 지방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어머니의 은돈 1100냥을 훔치자.
이 어머니가. 그 사람을 격렬히 저주하였다.
"어떤 노무 새끼가. 내 돈을 훔쳐갔냐?"며.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낸 것이다.
그랬더니. 이 친구가. 이실직고를 한다.
"어머니. 제가 그 돈을 훔쳐 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자. 이 엄마가. 이렇게 말한다.
"얘야. 주께서 너에게 복을 주시기를 바란다"
뭐 이런 경우가 있단 말인가.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던 사람이.
어떻게 하루 아침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오히려. 정말 제대로 된 부모라면.
자식이 어긋난 길을 갔을 때.
이 아이를 바르게 가르치고 훈육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 엄마에게.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내 인생의 시다바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내가 복을 얻고. 내 자식이 복을 얻는 게 중요하지.
하나님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렇기에. 미가의 엄마는. 원리 원칙도 없이.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내가 곧 법"인 세상 속에서.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다는데.
그게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근데. 미가의 집의 패역상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뒷 부분을 보면. 그의 패역함이 더욱 짙어져 가는 것 같다.
미가의 어머니는. 은 돈 200냥으로. 은을 입힌 우상을 만들었고.
이것을 개인 신당에 두고. 그 우상에게 절을 하고. 그 우상에게 복을 빌었다.
그리고. 자식 새끼 가운데 하나를. 제사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결과가 신통하진 않았나 보다.
왜냐하면. 뒷 부분을 보면.
유다 땅 베들레헴에 속한 청년 한 명을.
자기 사설 제사장으로 고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유도. 자격도. 부르심도. 기준도 묻지 않는다.
"그냥. 이 사람이. 레위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래서. 그 사람을 자기 사설 제사장으로 삼고자 하였으며.
은 10냥을. 그의 연봉으로 책정해 주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이 돈을 또 냉큼 받는다.
은 10냥에. 자기 목숨을 판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선택인가.
은 10냥이면. 노동자 40일치 월급 밖에 되지 않는데.
은 10냥에. 자기 인생을 걸고. 은 10냥에 자기 목숨을 건다고?
그것은 정말 어리석고. 미련한 일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가와 함께 살기로 작정하였다.
왜냐하면. 미가가. "어르신 어르신" 하는 게 듣기 좋았기 때문이다.
미가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까지 주겠다고 하고.
여기서 우리를 위해 복을 빌어주면. 매년 은 10냥까지 따로 챙겨주겠다고 하니.
이 사람 입장에서는. 이게 얼마나 혹하는 제안인가.
보수는 좀 적을 지 몰라도.
일하는 거에 비하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 레위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미가와 그의 집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
이것이. 그에게 좋은 선택/길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렇게 하면. 자기 인생이 좀 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생각하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신앙"이 아니라. "종교 장사"에 불과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인데.
여기 하나님의 이름이 어디에 등장하는가?
아무 데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은. 빙다리 핫바지에 불과했고.
미가가 만든 나무 목상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은 그러면서도.
자기들 잘못이 무엇인지 하나도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주께서 <틀림없이> 자기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 생각하였고.
"맹신. 광신. 미신"을. 그들의 종교적 확신이라 생각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암흑기/흑암에 불과하였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하나님)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것"처럼.
무법천지/나쁜 놈들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게.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모습/양태였던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본다.
오늘 우리는. 어떠할까?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르진 않을까?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사실은 나를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목회자는. 하나님과 성도들 사이에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고.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본래의 목적/본래의 역할인데.
이것을. 개인의 생계 유지를 위한. 밧줄로 삼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레위인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독립적인 위치에서. 독립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였는데.
이렇게 누군가에게. 돈으로 또 관계로 매이다 보면.
그가 어찌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과 책임을.
소신 있게. 책임감 있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너무 가슴이 아픈 것은.
오늘 우리의 모습이. 사사 시대의 모습과 너무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자신의 복과 안녕을 위한 복의 통로로 전락하고.
십자가가. 내 삶의 우상이 되고.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아닌. 내 삶의 시다바리가 되고.
많은 목회자/사역자들이. 이 일을 부르심이 아닌. 직업적으로 이 일을 대하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이야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얘기. 사람들이 기뻐하는 얘기.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를 하는 상황 속에서.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임계점이 넘어가면.
어느 순간. 자정 능력을 모두 상실하게 되는데.
오늘 우리만은 정말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바라기는. 삼손이 하나님을 향해.
"주 하나님. 나를 한번만 기억하여 주셔서.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주께서 그런 은혜와 회개의 돌이킴을 허락해 주시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내 삶이. 또 우리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돌이키는 삶이 되면 좋겠고.
형식적인 믿음. 맹목적인 믿음.
우상으로 가득한 미신. 죽어있는 신앙이 이나라.
그리스도 안에서. 바르고 참된 신앙.
살아있는 믿음. 진실한 믿음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이 아침. 무거운 마음으로 이 찬양을 부른다.
주께서 다시 한번. 이 땅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주께서 다시 한번.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주님 앞에. 무릎으로 나아간다.
(feat. 다시 한번 부흥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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