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0:1-12
신명기 24장 1절을 보면. 성경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그의 손에 이혼 증서를 써 주고. 그를 내보낼 것이요”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었다.
그 당시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호나 돌봄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함부로 내쫓김을 당하지 않도록.
<수치스러운 일>이 발견되었을 때만.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였고.
이혼한 여자들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합법적으로 제도/새로운 살 길을 마련해 주었다.
그게. <이혼 증서>였고.
이혼 증서를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 새로운 결혼을 할 수 있었다.
근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고. 다른 방식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이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저마다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화를 보면.
수치스러운 일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리고 있다.
“아내가 요리를 망친다든지..
아내가 낯모르는 남자와 이야기를 한다든지..
아내가 일을 잘 못한다든지..
혹은 아내가 남편의 친가쪽에 대해 좀 싫은 이유를 한다든지..
심지어 아내의 목소리가 이웃집 사람에게 들린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치스럽고. 이혼할 사유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세의 율법과. 하나님의 법/취지를 완벽히 왜곡시킨 것이다.
아니 이게 어떻게. 아내가 남편을 수치스럽게 만든 일인가.
이게 어떻게. 남편이 아내와 도저히 살지 못하는 이유가 되고.
이게 어떻게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새 장가를 들고. 새롭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된단 말인가.
이것은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일 뿐이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대로 사람들을 판단하고 제단할 뿐이니.
세상에 둘도 없는. 악법이요 악습일 뿐이다.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수치를 당했다면.
아내도 남편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할 때가 있을 터인데.
왜 그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엄격하고 신중히 대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왜 여자에 대해서만. 이렇게 엄격하고 높은 법을 들이밀고.
왜 남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생각해 보면. 정말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법이다.
근데 어쩔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법을 만들고. 제도를 시행하는 사람들이. 남자들이였기 때문이다.
남자들이 법을 만들고. 남자들이 법을 시행하는데.
어찌 다른 말을 하고. 저항할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다.
근데 이에 대해 우리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한 것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
이것은 우리 주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을 교정해 준 것인데.
크게 2가지 포인트가 있는 것 같다.
첫번째는. <하나님이> 결정한 것을.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고 나눌 기준/이유가 없다는 것이며.
두번째는. <아내만> 부정한 일/수치스러운 일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남편도> 부정한 일/수치스러운 일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장가 드는 사람>은.
그 아내/본처에게 간음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남자들의 부정/불의함을 가리키는 것이다.
자기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말씀을 인용/왜곡시키는 것은 바르지 않은 행동이며.
그렇게 말씀을. 사사롭게 자기 중심적으로 오용/남용하다가는.
하나님께 큰 코를 다치고. 큰 해를 입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 같다.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율법관/재판장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판단하며. 기준이 되었는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엄격한 짐을 지우면서도.
자기들은 손 하나도 까딱하지 않고.
손에 물 한방울도 적시지 않으려고 하였는데.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은. 타인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엄격하고. 높은 기준을 들이 밀었는데.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떤 생각과 기준을 가지고 있는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하였는데.
오늘 우리는. 율법의 기준과 의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비와 관용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그들을 용납하고 있는가?
명절 연휴를 보내며. 여러 가지 이유로 부대끼고 혼잡한 마음 가운데.
오늘 주께서 우리 가운데.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길 소원한다.
혹시 오늘 우리 마음이. 높아지고 교만해져 있다면.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겸손케 해주시길 소망하며.
오늘 우리 마음이. 형제자매에 대해서는. 엄격한 판단과 기준을 내세우면서도.
오늘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헐렁한 판단과 기준을 내세우고 있다면.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긍휼히 여겨주시길 소망하며.
그렇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살벌하고 냉혈함으로 가득한. 그런 세상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직 주의 자비와 주의 긍휼이 가득한.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하늘에 영광을 다 버리고. 낮은 이 곳에 내려오신 주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얼마나 큰지.
우리가 높아지면 그가 낮추시리. 우리가 낮아지면 그가 높이시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나 자신을 낮추는 섬김으로
내 발을 닦아주사 먼저 섬기시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었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으로. 나 자신을 드리는 섬김의 모습이 되기를”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의 자비와 주의 겸손과 주의 사랑과 주의 섬김으로 가득하길.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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