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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17 :: 2024.11.17(주일) 딤후 3:10-17
딤후 3:10-17
예전에 교회에서 불렀던 복음성가 가운데.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이라는 찬양이 있다.
찬양의 가사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온전한 몸짓으로.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님. 곁눈질 하긴 싫어요.
하지만 내 모습은 온전치 않아. 세상이 보는 눈은.
마치 날 죄인처럼 멀리하며. 외면을 하네요”
이것은. 성도를 향한.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담은 곡이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온전하게 살아가고 싶은데.
사람들이 계속 나를. 조롱하고 비아냥 거리는 것 같으니까.
나도 그들을 닮아가고. 그들 속에 머무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찬양의 가사를 보면.
“주님. 나도 똑바로 보고 싶고. 곁눈질 하긴 싫고.
주님 안에서.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서. 고통스럽고. 힘들다”는.
그 마음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근데 이 일이. 어찌 이 곡을 만든 사람에게만 적용 되겠는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마음이 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악인이 흥왕하고. 그들이 배부르면’
우리도 똑같이 시험에 들고. 낙망하게 되는 것이.
그게 인간의 마음이고. 그게 인간의 성정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도.
똑같은 일이 있지 않았는가.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그들 가운데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다.
한 부류는. 사도 바울을 찾아. 매일 그를 격려해주고. 위로해주던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또 다른 한 부류는. 사도 바울을 배신하고 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1장 15절에서 18절을 보면.
‘오네시보로’와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대조해서 그리고 있는데.
이것이 그 당시. 사도 바울을 둘러싼 두 부류의 반응이었다.
근데 이 마음이. 어찌 그들에게만 있을 수 있겠는가.
디모데에게도. 똑같은 마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머리로는. 복음을 전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너무 중요하고. 또 맞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음으로는/심정적으로는.
발걸음이 떼지지 않고. 두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었을 것이다.
“내가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이. 박해를 받고. 고난을 받는 일을 내가 직접 봤는데.
나도 과연 그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사도 바울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우리 주님을 배신/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이 길을 걸어 갔는데.
나는…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그래서 머리로는. 주의 부르심의 뜻을 잘 알고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디모데에게.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다.
“(내가) 박해를 받음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박해를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에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니.
네가 이 불안함과 두려움 가운데. 염려하지 말길 바란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요.
우리 주님은. 그 가운데서.
우리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시느니라(딤후 3:10-13)”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의 가치 판단 기준을. 우리의 마음에 두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 그 기준을 두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딤후 3:16)”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한. 능력을 주시기(딤후 3:17)” 때문이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딤후 3:15).
우리가 이 말씀 안에서. 구원을 얻고. 생명을 얻기를.
사도 바울이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한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4).
주변 사람들을 보고. 거기 기웃거리거나. 한눈 팔지 말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의 말씀에만 천착하길 원한다.
우리가 살다 보면. 때때로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때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를 버리지 말고. 주를 외면하지 말아라.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스스로 속이고. 스스로 속기도 하겠으나(딤후 3:13).
우리는 결코 그래선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사망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바르게 살 수 있고. 오직 주를 따라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의 말씀. 당신의 말씀 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말씀에 천착하고. 말씀에 집중하는.
그런 나와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휘둘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오직 주의 말씀 앞에. 우리 삶의 향방을 정하고. 마음을 정하는.
그런 내가 되고.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오늘 하루.
주의 강단에서. 주의 말씀이 선포될 텐데.
이것이 인간의 뜻이나.
인간의 사사로운 감정/이론을 전달하는. 그런 장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말씀을 전하는 자나. 말씀을 듣는 자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려워 떨며.
오직 주의 말씀만 선포되고. 주의 말씀만 증거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고.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나의 가고 서는 것. 주님 뜻에 있으니. 오 주여. 나를 이끄소서.
뜻하신 그 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연약한 내 영혼 통하여 일하소서.
주님 나라와 그 뜻을 위하여.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오 주님. 나를 이끄소서”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주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며.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주의 말씀 앞에 엎드리고. 주의 말씀 앞에 무릎 꿇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하루 되길 주님 앞에 간절히 사모하며.
오늘 하루의 삶을. 온전히 주께 올려드리길 원한다.
(feat. 주님 말씀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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