슥 7:1-14
베델에서 사절단이 찾아왔다.
이들은. 한 가지 질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매년 5월마다 해오던 금식을.
앞으로도 계속해야 하는 지에 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5월의 금식이 시작된 까닭이.
이스라엘의 멸망 때문이었는데(왕하 25:8-9).
지금은 우리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왔으니.
그리고. 스룹바벨 성전도 거의 완공 되었으니.
더 이상 금식을 해야 할 필요(명분)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원하는 것을. Take it. 얻어내었으니.
더 이상 금식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이렇게 말한다.
"오케이! 너희가 지난 70년 동안. 열심히 금식해 온 것이 맞다.
그런데. 그게. 정말 나를 생각해서 한 금식이었냐?
아니면. 너희의 종교적 욕망 때문이었냐?
무너져 내린 성전을 생각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탄식 때문이었냐.
아니면. 너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였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숨겨진 욕망을 드러내면서.
금식이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해 되묻고 있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공정한 재판을 하고. 자비와 관용을 베풀어라.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을 억누르지 말고.
동포를 해치지 말아라"
"내 얘기를 귓등으로 듣지 않던.
이스라엘 선조처럼. 멸망의 길을 걷지 말고.
주의 말씀을 듣고. 겸손히 행하라"
금식이라는. 종교적 행위 자체가 아니라.
정말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된 예배자의 삶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읽으며. 나에게도 이렇게 질문해 보았다.
"재식아. 네가 진정 나를 생각하여서. 말씀을 보느냐?
아니면. 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서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라면.
그것은.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
은밀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구제하며. 금식하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할텐데.
우리는 맛을 잃어가는 소금이 되어가지는 않을까?
그렇기에. 오늘 아침.
이 찬양이 계속해서 입가에 맴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오늘 하루. 이 찬양의 고백처럼.
겸손히 주님 앞에. 나의 삶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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