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1:17-29

아합은. 목숨을 다해. 악을 도모하였다.

주께서.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자신의 눈 앞에서. 하나님의 현현을 경험하고.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 눈 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앞에 자신을 돌이키지 아니하였다.

도리어. 그는.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목숨을 다해. 악을 도모하였다.
나봇의 포도원을 뺏기 위해. 거짓된 일을 꾸미고.
이 일로 나봇의 목숨까지 빼앗았으니. 이 얼마나 죄질이 나쁜 것인가.

그렇기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니. 왜 이렇게 목숨을 팔아 가면서까지. 악한 일을 하느냐
내 너 같은 놈 처음 본다.
정말. 죽고 싶어 정말 안달이 났구나(20절, 25절)"

결국. 아합은. 자기 생명줄이 짧아지는 지도 모르고.
계속. 망나니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


반면. 엘리야는. 목숨을 다해. 자기 사명을 감당하였다.

어찌보면. 말 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합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 됐습니다. 고마 하입시다"라고 말할 법 같기도 한데.
엘리야는.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렇기에 그는. 아합을 찾아가서. 진심어린 회개의 말씀을 건낸다.

요나처럼. 그까이꺼 대충.
'들으려면 듣고. 말려면 말아라'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열과 성을 다해. 하나님 말씀을 전했을 것이다.

거기엔. 아합을 향한 질책과 강한 책망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신 차리고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안타까움과 연민/긍휼의 마음 또한 있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엘리야와 아합의 모습이.
너무 절묘하게. 오버랩된다.

아합은 자기 생명줄이 짧아지는 지도 모르고.
목숨을 걸고. 악을 행하였다면.
엘리야는. 어떻게든 아합의 생명줄을 늘려 주기 위해.
목숨을 걸고. 선을 도모하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생각/마음/관심/열정"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물어보는 것 같다.

"나는. 어디에 목숨을 걸고 있는가?
나는. 목숨을 다해.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나는. 아합처럼.
목숨을 다해. 자기 욕심을 채우고. 악을 도모하며.
내 명이 짧아지는지도 모르고.
하나님 앞에서. 개망나니 같은 삶을 살아가는가?

아니면. 엘리야처럼.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목숨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며. 내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어떻게든. 다른 사람의 목숨을. 건지고/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가?"


바라기는. 오늘 우리의 삶이.
아합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일에. 우리의 목숨을 걸지 않고.
엘리야처럼. 선하고 지혜로운 일에. 우리의 목숨을 걸었으면 좋겠다.

때때로. "이렇게까지 했는데. 또 해야 돼?"라는.
절망과 한숨. 믿음 없음이. 우리 마음을 낙심시키기도 하지만.
다시 한번. 주께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주시고. 소망을 주시길 소원한다.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처럼 보였던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놀라운 반응/결실을 맺게 되었던 것처럼.
아합이 엘리야의 말을 듣고. 회개하며. 주님 앞에 돌아왔던 것처럼.
오늘 우리 삶에도. 불가능처럼 보였던 일들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 역사가 되고. 실제가 되는 일들이.
오늘 우리 삶에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기에. 히브리서에 기록된 이 말씀을 붙잡고.
오늘을 시작한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바라기는.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 믿음과 소망을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posted by The Sabb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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