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3-27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걸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보며. 큰 도전을 받았으며.
이분이야말로. 우리들을. 참으로 구원해 줄 메시아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의 손에 잡혀 죽으시고.
사흘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깊은 상심과. 실의에 빠졌다.
아니. 깨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여자들이 전하여준 소식을 듣고도. 그것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분명. 예수의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고 하고.
천사들이 분명. 예수께서 다시 살아났다고 했지만.
그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은 것이다.
우리 주님이. 분명. 내가 장사한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이 아닌가 하며.
궁금해 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했는데.
그들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며.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서로 토론하고. 의논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금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하며.
"혹시라도. 예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가고. 훼손한 것은 아닌지?" 하면서 말이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다시 사심은.
그들의 생각/선택지에는 없었던 것이며.
그들은 그냥. 이렇게 살아가며.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들의 생각과 눈이 어두워.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고. 아무 것도 헤아리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도 믿지 못하고.
여자들과. 제자들이. 전하여준 소식도 믿지 못하고.
심지어. 예수님이 자기들 곁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그를 깨닫지 못하고.
어찌 그를 알아볼 수 없단 말인가.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얘기다.
예수님이 이렇게라도 얘기하시면.
베드로가. 우리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이시다(요 21:7)"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그들도.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채고. 발견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체. 마음이 무딘 채로 머물러 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그들의 슬픔과 마음의 탄식이 너무 컸기 때문에.
그것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가렸기 때문이다.
내 인생에 너무 큰 충격과 아픔이. 나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거기 빠져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헤어나올 수 없는.
영적 슬럼프/구렁텅이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럴 때가 있는 것 같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충격/아픔을 겪게 될 때.
우리는 거기 매몰되게 되고.
몸과 마음이 지쳐서. 번아웃이 되게 될 때.
이제는 아무런 소망도 찾지 못하고.
아무런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될 때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실망과. 서운함이 주를 이루게 되면.
아무리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신다 하더라도.
그분을 믿지 못하고. 그분을 따를 수 없는 일이 있게 되고.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과 서운한 마음에.
삐닥하게 주를 바라보고. 삐딱하게 주를 대할 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주님을 향해서.
이와 같은 태도를 보일 때가 있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서로 주고 받는 말들이 무엇입니까?"라는 예수의 질문에.
"당신은. 예루살렘에 며칠 동안 머물러 있었으면서도.
<왜 어찌하여> 당신만 이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라고. 면박을 주고.
모멸감을 주었던 제자들처럼 말이다.
우리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우리 주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나를 이렇게 모른 척 하고. 내버려 둘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볼멘소리로. 투덜거리고 투정거리는 모습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참 낯설지 않고. 우리랑 참으로 비슷한 것 같다.
슬픔에 눈이 멀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탄식에 눈이 멀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지쳐서. 우리의 눈이 멀어버려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하고.
현실에 갇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소망을 잃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일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말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탄식하고. 신음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고.
주께서. 바디매오의 눈을 고치시고. 시력을 되찾게 했던 것처럼.
오늘 나에게도. 오늘 우리 공동체에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이와 같은 일들이 다시 회복되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이 찬양의 고백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소원한다.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눈을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주님 바라볼 수 있도록.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귀를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주님 말씀 들을 수 있도록.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눈을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 내 귀를 열어주소서."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주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겸손히 주께 의탁한다.
(feat.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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