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52
예수님과 그의 가족들은.
해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직선거리로만 100km가 넘었으니.
가족들을 데리고 그 길을 찾는다는 것이.
그에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찾아갔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주신. 약속의 계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유월절/초막절/칠칠절 이렇게 1년에 3번은.
예루살렘을 찾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를 경배했어야 했는데.
요셉과 그의 가족은 어떻게든 그 약속을 지키고. 준수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돌아오는 길에 사고가 생기고 말았다.
그것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그가 행방불명 되었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럴만 하다.
그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온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고.
그 당시 예수님에겐.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동생들도 여럿 있었으니.
요셉과 마리아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만도 했겠다.
그래서 하루길을 간 다음.
그 다음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래서 요셉과 마리아는. 황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사흘 후 성전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는데...
재밌는 것은. 예수님의 얼굴에는. 아무런 긴장과 염려가 없어보인다는 것이다.
오히려 평안한 얼굴이다.
부모는 속이 타서/애가 타서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예수님은 아무런 근심도 없이.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말씀을 논하고 있다.
참 태연한 모습이다.
어쩜 그리 태연하고. 느긋하게 지낼 수 있을까.
'애늙은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나는 것 같다.
그래서 48절을 보면. 마리아가.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하는데.
아마 사람들이 없었다면. 등짝 스매싱을 날렸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이 말에 대해 우리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이렇게 말씀하신다. 4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이 말이 마리아의 마음에. 큰 돌을 하나 던진 것 같다.
"나는 이 아이를 생각하며. 여전히 어린 아이/철부지라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는 언제 이렇게 큰 것일까.
나는 이 아이를 생각하며. 여전히 내 아이/여전히 내 자식이라 생각했는데.
하나님이 하시는 말이. '이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라. 이 아이는 내 아이라'고 말씀하시니.
이 말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가슴 철렁하게 다가왔을까."
아마 마리아는. 이 얘기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분명 예수님을 낳을 때는.
"이 아이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아들이 되며.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통해. 크신 일을 이루실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아이는 '하나님의 아이'가 아니라. '내 아이'라 생각했나 보다.
그간 금이야 옥이야. 정말 마음다해 그를 돌봐왔는데.
이제 이 아이가 커서. 하나님의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하니.
마리아의 마음에 두 마음이 함께 교차하는 것 같다.
"그간 잘 커줘서 고맙다"는 마음과.
못내 "예수를 떠나보내기 아쉬운 마음과 그리운 마음" 이 두 마음이 함께 교차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51절을 보면.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는 말씀과 함께.
"그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는 말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마리아는 이때부터 예수님을 떠나보낼 준비를 하지 않았나 싶다.
그간 '내 자식이라' 생각하며.
그간 '내 품' 안에서.
얼마든지 그를 소유할 수 있다 생각했는데...
오늘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그는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 소유'이며.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께 맡겨드려야 함을.
마리아가 깨닫고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깊은 경종을 울리는 것 같다.
실제로 오늘 이 땅을 살아가며.
우리도 요셉과 마리아처럼 실수하며 넘어질 때가 얼마나 많은가.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집착'을 남길 때도 있으며.
'섬김'이라는 이름 하에. '자기 조종과 통제'의 손길 안에 둘 때도 참 많은 것 같다.
아이들이 자리기 위해서는. '의존과 독립'을 적절히 균형있게 해줘야 하는데.
'내 품 안의 자식으로. 내 손의 자식으로' 키우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아이들이 다른 방향으로 튀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나의 사랑과 섬김이 부족하지 않았나 탓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서로 안에 관계의 악순환이 생기게 되고.
아이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 하나님은 '그것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하신다.
왜냐면. 아이의 주인은 '너'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이다.
네가 섬기고 돌보고 사랑해야 될 대상은. '그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하나님은. 그 아이를 내려놓고. 내게 오고. 나를 섬기기를 원하신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요구한. 하나님의 모습과 같다.
"네 아들. 네 독자. 네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말씀하실 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도 이것과 같지 않은가.
그 아이는 '네 아들'이 아니라. '내 아들'이며.
그 아이는. '네 독자/네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내 독자/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네가 그 아이를 사랑하고. 네가 그 아이를 아끼는 마음보다.
내가 그 아이를 사랑하고. 내가 그 아이를 아끼는 마음이 훨씬 더 크니.
그 아이를 내게 맡기고. 그 아이를 내게 넘겨주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는데.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자세/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가 우상이 되고. 자녀가 영웅이 되는' 이 때에.
오늘 우리는 무엇을 섬기고 있을까.
자녀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도.
이것은 동일하게 적용된다.
오늘 내게 주어진 우리 가정.
오늘 내게 주어진 우리 자녀들.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의 모든 시간과 재물.
오늘 내게 주어진 우리의 생명까지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네게 있는 것을. 내게 바치라'고 말씀하시는데...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이 말씀 앞에 겸손히 반응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모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 주소서.
어제 일과 내일 일도. 꿈과 희망 모두 드립니다.
모든 소망. 모든 계획. 내 손과 마음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 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오늘 하루 나와 우리 공동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모든 과정과 여정 가운데.
우리 하나님의 은혜와 그분의 통치만 드러나며.
오늘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 홀로 찬양 받으시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도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feat. 나의 모습 나의 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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