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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09 ::
2025.02.09(주일) 눅 1:26-56
눅 1:26-56
누가복음 1장을 보면. 두 사람의 임신 소식이 나온다.
한명은 '엘리사벳'이고. 한명은 '마리아'다.
엘리사벳은 결혼한지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 아이가 없었고.
마리아는 '아직' 요셉과 결혼하지 않은.
처녀/남자를 알지 못하는 몸에 불과했다.
근데 두 사람이. 모두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한 사람을. <아이를 가질 수 없어서>.
이미 오랜 세월 고통 가운데 있었는데. 그 사람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한 사람은.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될>.
처녀의 몸/약혼한 처녀였는데. 그 사람도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반응은. 당연히 이래야 한다.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사람"은.
주께서 우리 가운데 아이를 주신다 하니. 감사하고 기뻐해야 하고.
"아이를 가져선 안 되는 사람"은.
당연히 화들짝 놀라고. 이 말을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일이 이뤄지면. 그는 결혼을 취소 당하고.
파혼/음란한 여자로. 낙인이 찍히게 되기 때문이다.
근데 재밌는 것은. 두 사람의 반응이. 완전히 반대로 나타난다.
먼저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를 보면.
"주께서 너의 간구를 듣고.
내가 네게 아들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눅 1:13)"고 말씀하시는데.
사가랴는 이 얘기를 듣고. 콧방귀를 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가 늙었고. 오랜 세월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천사의 얘기를 듣고. 콧방귀를 뀌던 사라의 모습과 같다.
"이미 내 태가 끊어지고. 더 이상 배란을 할 수가 없는데.
내가 무슨 아이를 낳고. 생명을 가진단 말인가(눅 1:18)"
그래서 사가랴는. 대놓고 천사의 말을 거부하는데.
이 일대 대한 댓가로.
그는 벙어리가 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을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정반대의 반응을 하였다.
그는 분명. 아이를 가져선 안 될 사람인데.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르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눅 1:30)"는 말씀을 듣고.
"나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 1:38)"라고 말한다.
마리아는 도대체 뭘 믿은 걸까.
자기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라는 것을.
마리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마리아는 도대체 뭘 믿고 이런 말을 했단 말인가.
혹시라도 마리아가 임신을 하게 된다면.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어줄 것인가?
"내가.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말미암아. 아이를 가졌다"라고 말하면.
누가 그 말을 믿고. 누가 그 말을 들어준단 말인가.
오히려 신성모독죄로. 매를 맞고. 돌을 맞을 일이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말씀임을 믿고.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길 간구"하였다.
주의 말씀이 사실이면. 오늘 그 말씀이 내게 이뤄질 것이며.
그 말씀이 사실이 아니라면. 오늘 그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마리아는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 길로 곧장. 엘리사벳의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그는 엘리사벳이 정말. 아이를 가졌는지 묻고 싶었다.
지금 자기에게 벌어진 일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 묻고 싶었고.
이 일을 통해. 주께서 우리 가운데. 무슨 일을 하실지.
그 길을 묻고. 그 뜻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 집에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에 돌아가게 되는데.
이것은. 내가 아이를 가진 것이. 결혼 생활/요셉을 통해 아이를 가진 것이 아니라.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성령으로 아이를 가진 것임을.
확인하고 증거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마리아는. 오늘 주님 앞에 찬양하며.
이 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이렇게 대조되는 것 같다.
한 사람(사가랴)은.
"주께서 우리 가운데. 그 약속을 보여주시면.
그러면 내가 믿겠다"고 말하고 있고.
마리아는.
"주께서 하신 말씀을 내가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주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보고 그것을 찬양하겠다"고 말한다.
한 사람은. 믿음 이전에.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한 사람은. 증거 이전에.
"오늘 주의 말씀이 약속대로 이루어지며.
주의 말씀이 있는 모습 그대로. 내게 이뤄지고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이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묻고. 확인하길 원하시는 것 같다.
오늘 우리는. <믿음 이전에 증거를 요구>하는 자인가.
아니면. <증거 이전에. 믿음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자인가.
바라기는 오늘 나와 우리 공동체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불신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되지 않았으면 좋겠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주께서 우리 가운데 하신. 당신의 약속/당신의 말씀을.
'아멘'으로 기쁘게 순종하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목소리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반석을 두며. 하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는.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 마리아가.
"주께서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시며.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라(눅 1:48)"고 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삶이. <오늘 이 땅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에 주께서 이루실 약속/그 일들>에 소망을 두는 우리가 되면 좋겠고.
오늘 주께서. 당신의 능력과 그 힘있는 팔로.
교만한 자들은 흩으시고.
주리고 굶주리는 자는. 주께서 높이시고 세우시는.
그런 우리나라. 그런 우리 공동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기에. 오늘 하루를 살아가며.
하나님 앞에 이 찬양의 고백으로 나아가길 원한다.
"주님 제 마음이 너무 둔해서.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 땅에 속하여. 이 땅만 보다가. 주님 손을 놓쳤습니다.
나는 나그네로 왔는데. 왜 주저앉게 되었나.
나는 청지기인데. 언제부터 내 삶의 주인이 되어 버렸나.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고된 수고도. 다 헛될 뿐이라.
믿음이 없어서. 무너진 삶의 모든 자리에. 다시 주님을 기다립니다"
오늘 하루 주께서 우리 가운데.
믿음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그런 하루. 그런 복된 공동체 되길 소망하며.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을 인해 부요하며. 주로 충만한.
그런 우리 공동체. 그런 나의 삶 되길 소망하며.
오늘 하루를 주님 앞에. 겸손히 의탁하여 드리길 원한다.
(feat. 믿음이 없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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